던져진 것이 돌만은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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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져진 것이 돌만은 아니니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12.19 16:06
  • 호수 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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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파국의 소용돌이 1

이어마을 대나무 움집에 다시 불이 밝혀졌다. 시간이 육신의 상처를 아물게 하듯이 구자효 상쇠 어른에게 닥친 액운도 조금씩 수습되었다. 마을 사람은 물론 식솔들의 면회까지도 막던 관아가, 요구하던 환곡 물량을 십시일반 모아 납부하고, 거기에 동네 경조사를 대비해 갈무려 둔 금전을 뒷돈으로 찔러주니 후다닥 상쇠 어른을 풀어 주었다.


옥에서 풀려났을 때 상쇠 어른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따라간 의원이 뼈에는 이상이 없다고 진단해 안심하기는 했지만, 거둥이 어려울 만큼 상쇠 어른은 모진 매를 맞았다. 상쇠 어른은 볏짚 속에 몸을 웅크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남쪽 따뜻한 고장이라고 해도 겨울이 성큼 다가선 때 옥 안은 냉골이나 다름없었다.


보기와 달리 잔정이 많은 유순심이 상쇠 어른을 부여안더니 목을 놓아 통곡했다.


"우찌 이런 날벼락이 있을끼고. 상쇠 어른이 나라로 팔아묵었나, 역모로 꾸몄나? 대역죄인이라캐도 칠순 노인네를 이리 잡도리하진 않을낀데.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가베. 천벌을 받을 끼구먼. 엉엉엉!"


유순심은 옆에서 멀뚱히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 포졸들에게 살쾡이 눈을 뜨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포졸들이라지만 그들 역시 섬 마을 사람들이었다. 관령(官令)이 무서워 죄인처럼 다그치긴 했지만, 일말의 양심을 속일 순 없었다. 애써 사람들 눈을 피하며 코만 씰룩거렸다.


"차라. 쟈들이 무신 죄가 있것노. 시킨께 마지못해 잡친게여."


솜이 넉넉히 들어간 이불로 상쇠 어른을 감싸며 이말심 노인이 포졸들 역성을 들었다. 이말심 노인이 사골 뼈를 푹 고고 좁쌀과 흰쌀을 갈아 끓인 미음을 상쇠 어른의 입에 조금씩 흘려 넣었다.


뜨거운 국물이 들어가자 얼음장처럼 굳어 있던 상쇠 어른의 몸이 조금씩 녹아내렸고, 피가 도는지 혈이 뚫렸는지 혈색이 돌아왔다. 이말심 노인이 한숨 돌리며 말했다.


"이만한기 다행이데이.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목심이 붙었으니 뭘 더 바라것노. 사람이 목심 버리기가 한순간인데, 그래도 상쇠 어른이 명줄은 길게 타고났나베. 방자야, 구루마 드리왔나? 쌔이 상쇠 어른 모시라."
그제야 옥 밖에서 분을 삭이며 땅에 발길질을 하던 방자와 동네사람, 일가붙이들이 우르르 옥 안으로 몰려왔다. 포졸 중에 아는 얼굴이 눈에 띄자 방자가 대뜸 멱살부터 잡았다.


"야, 팔배 이 자슥아. 상쇠 어른은 니허고 오촌 당숙지간 아이가. 강생이도 지 엄니 그림자는 피한다는디, 저 지경이 되도록 내팽겨쳐뒀나? 이 육실헐 눔아!"


얼마나 오지게 멱살을 잡았는지 팔배가 얼굴이 허옇게 되면서 발버둥을 쳤다. 삼지창을 바투 잡은 동료 포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치만 살폈다. 이말심 노인이 된통 호통을 쳤다.


"니꺼지 옥살이 할 작정이가. 당장 안놓나!"


마지못한 방자가 팔배를 저만치 밀어버렸다. 구석에서 팔배가 목을 잡고 캑캑거렸다.


"어째 이리 옥 안이 시끄럽냐? 관장을 능멸하고도 모자라 이제는 포졸까지 달아 올릴 참이냐? 이런 무지렁이들하고는."


언제 나타났는지 사람들 등 뒤에서 조옹집 포교가 오금을 박듯이 언성을 높였다. 기둥을 치는 육모방망이 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관아의 포교는 무서운 존재였다. 분노가 치솟던 사람들이 조옹집의 목소리 한 마디에 다들 허리를 꺾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방자만은 기가 죽지 않아 거센 숨을 몰아쉬며 조옹집을 노려보았다.


"엥! 너 방자 아니냐? 도련님은 어디 두고 예서 허튼 짓거리냐?"


이 모든 사달의 장본인이 조옹집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경거망동했다가는 일만 커진다는 걸 잘 아는 방자기도 했다. 애써 고개를 돌리며 목에 날을 세워 대꾸했다.


"도련님이야 선소 정자집에 잘 계시지예. 동지섣달에 애먼 백성이 치도곤을 당하는디, 글이 눈에 들어오실지 모리것소. 죄인으로 몰린 분이 우리 동네 어른이라 기체후 일양만강하신지 문안 디리러 왔시다."


말 속에 담긴 대바늘을 읽은 조옹집이 눈을 부라렸다.


"이 새꺄, 혼정신성(昏定晨省)은 네놈 집에나 가서 챙겨. 도련님을 혼자 뒀다 탈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썩 꺼져!"


제 딴에는 도련님과 홍이가 남의 눈이 편할 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하는 채근이었다. 방자는 계속 어깃장을 놓으며 뇌까렸다.


"그리 걱정되몬 포교님이 직접 가서 챙기지예. 도련님이야 홍이가 곁에서 낭군님처럼 살뜰히 뫼시는디 걱정도 팔자요."


방자가 대담하게 자신의 약점을 파고들자 강단 좋은 조옹집도 움츠려들었다. 잠깐 우물거리던 조옹집이 육모방망이를 휘두르며 사람들을 내몰았다.


"더 이상 말 섞기도 싫다. 당장 저 놈 끌고나가!"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상쇠 어른은 열흘 넘게 몸져누워 있어야 했다. 그래도 워낙 근력이 좋은 상쇠 어른이라 바로 기력을 되찾았다.


"시방 자리보전할 때가 아니여. 풍물 경합이 코앞인데, 기량이 녹 쓸면 안 될 거구먼. 어여 매구패들을 불러."


움집의 화톳불은 매구패의 전의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넘실넘실 불길을 풀어 올렸다. 방자가 장작을 한 아름 던져 넣으며 외쳤다.


"이 불길로 이눔의 더런 시상 다 태워버리는겨. 퉤-퉤!"


오늘은 박태수 포교도 매구 복색을 갖추고 참가했다. 깡마른 체구에 상모를 돌리며 소고를 만지는 품이 당랑(螳螂, 사마귀)을 연상시켰다. 옥진이도 맑은 청주 두어 통과 지짐이 거리를 잔뜩 준비해와 솥뚜껑을 엎어놓고 들기름을 둘러 발랐다. 따끈한 청주를 한 사발씩 들이키니 추위는 싹 가시고 몸에서 더운 열이 솟구쳤다.


매구 가락에 맞춰 꽹과리를 첸지란 첸지란 지란 지란 첸지란 두드리던 구자효 상쇠 어른이 박태수를 흘깃 보며 말했다.


"관아 분위기가 심상찮을 텐디 자리를 비워도 괜찮은감?"


박태수의 몸놀림은 경쾌했지만, 어딘가 사뭇 비장한 느낌이 묻어 나왔다.
"이가 없시몬 잇몸으로 때우것지요. 관아라면 내도 치가 떨립니다."

 


박태수가 악령을 떨치듯 머리를 세게 휘저었다.


오늘 낮 군기(軍器)를 점검하고 있는데, 조옹집이 다가오더니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뭐여?"


환곡을 수탈하기 위해 곤욕을 당한 이는 상쇠 어른만이 아니었다. 고현 방면 주민들이 고분고분 환곡미를 싸들고 오자, 조옹집은 자신의 처방이 씨가 먹혔다면서 읍성의 남부와 서부 지역에서도 똑같은 패악을 저질렀다. 마을에서 신망을 얻은 집안의 가장을 가타부타 말도 없이 끌고 와 곤장부터 올려붙였다. 현령이 눈감아준 불법은 이미 정당한 직무였다.


때 아니게 관아의 옥이 죄인으로 넘쳐났고, 낮밤을 가리지 않고 동헌 마당에서는 비명 소리가 낭자했다. 그 소리가 듣기 싫어 군기고에 들어앉은 참이었다.


주변에 눈이 없는 것을 확인한 조옹집이 목소리를 낮추며 수군댔다.


"자네 차덕구네 식구들하고 사이가 좋지? 내 부탁 하나 들어줘야겠네."


"그 집안하고 발 끊은 지 오래여. 할 말이 있시몬 직접 가 허게. 볼기를 치든 곤장을 멕이든."


지난 번 앙금이 가시지 않은 박태수가 퉁명스럽게 외면했다. 그러자 조옹집이 갑자기 살갑게 다가왔다.


"어허, 사람이 별 일도 아닌 걸 갖고 골을 내는구먼.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자네가 가서 홍이를 내 집으로 보내라 권해보게나. 이 기회에 월하노인(月下老人, 중매쟁이의 다른 말) 노릇 한 번 해보란 거지. 잘 되면 떡이 서 말뿐이겠나."


박태수가 벌컥 화를 내며 되받아쳤다.


"씨도 안 먹힐 소리 말아여. 나이 차가 얼만 줄 알고 하는 소린겨? 뺨만 맞아도 다행일 걸세. 난 일 없네."


박태수의 입김에서 쌩쌩 찬바람이 불자 조옹집의 표정이 바뀌었다.


"자네 그렇게 모로 나가면 재미없어. 이 서찰 한 번 읽어보겠나? 마음이 싹 바뀔 걸."


조옹집이 박태수에게 여러 겹으로 접힌 종이를 내밀었다.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면서 낚아채듯 서찰을 받아 펼쳐들었다. 몇 줄 읽어나가던 박태수의 얼굴이 짐독이라도 삼킨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갔다.


"오데서 이런 해괴망측한……"


서찰을 움켜쥔 박태수의 손이 학질 걸린 사람처럼 후들거렸다. 조옹집이 음흉스럽게 손바닥을 비비며 입맛을 다셨다.


"거기 적힌 일이 거짓이라 하진 못할 게고. 내 전부터 자네 안사람 행적이 수상하던 차였는데, 얼마 전에 화순에서 알고 지내던 포교가 찾아왔지 뭔가. 자네 안사람 고향이 화순이라지? 그래 남해에 이러저러한 아낙이 사는데, 과거에 그 쪽 동네에서 살았다니, 가거든 한 번 수소문해 보라 일렀네. 알겠다더군. 그리고 며칠 전에 이 서찰이 당도했는데, 허허! 거 참, 읽으면서도 내 눈이 의심스럽더구먼. 이 일이 들통 나면 옥진이만 죽어나는 게 아니지, 죄인을 숨겨준 자네도 무사하지 못할 터. 어디 발뺌을 하려거든 해 보시게나."


열패감으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서찰에 적힌 일은 모두 사실이었다.


옥진이는 화순에 살던 농부의 딸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하던 집안 형편 때문에 일찌감치 이웃 사내에게 땅 얼마를 얹어 받으며 시집을 보냈다. 입 하나 덜자고 짜낸 궁여지책이었지만, 옥진에게는 끔찍한 지옥문이 열린 꼴이었다. 멀쩡한 사내인 줄 알았던 사내는 술만 마시면 옥진에게 매질을 했고, 술에 취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사정을 아는 옥진은 집에 말도 못하고 그 모진 매질을 이겨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내는 그야말로 곤죽이 되어 새벽에 집구석으로 돌아왔다. 남편을 기다리다 설핏 잠이 든 옥진을 보자 매질이 시작되었다. 그저 몇 대 후려치고 끝나려니 했는데, 마구잡이로 주먹질이 이어졌다. 견디다 못한 옥진이 사내를 밀어냈더니, 부엌에 들어간 사내가 식칼을 들고 나왔다. 눈에 핏발과 함께 살기가 들끓었다.


휘두르는 칼날을 피하려고 정신없이 남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남편 가슴에 식칼이 박혀 있었다. 가슴에서 피가 쾅쾅 쏟아져 나왔다. 넋이 나간 옥진은 달아났다. 그저 집에서 멀어지고만 싶었다.


몇날 며칠 귀신 들린 사람처럼 산길과 들길을 헤매다 문득 바닷바람에 고개를 들어보니 남해 앞바다 노량 나루였다. 저 바다에 풍덩 빠져 죽으려고 했다. 해협의 거센 물살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옥진을 건져낸 사람이 박태수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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