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져진 것이 돌만은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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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져진 것이 돌만은 아니니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12.26 11:37
  • 호수 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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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파국의 소용돌이 2

재앙은 홑으로 오지 않았다. 그 마수가 이번에는 차덕구네 집을 덮쳤다. 금산 보리암에서 꿈결 같은 하루를 보내고 보름여 뒤였다.


금산에서 돌아온 권문탁은 홍이를 아내로 대우했다. 말도 함부로 하지 않았고,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자신도 나서 거들었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더구나 아버지 권진태가 안다면 불벼락이 아니라 당장 짐을 싸서 도성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조심스러웠다. 둘만의 비밀로 지켜야 할 사랑은 짜릿하면서도 불안과 긴장이 차곡차곡 쌓이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선소 정자집은 해변 쪽에서는 지붕과 서까래가 보일 정도였지만, 읍성에서는 마당까지 훤히 드러났다.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이 손바닥 보듯 집혀졌다. 언제 누가 찾아올지 몰라 손 하나 잡는데도 사방을 살펴야 했다. 반지빠른 방자는 눈치를 챈 기색이 완연했지만, 그렇다고 망을 봐 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었다. 권문탁은 어한(禦寒)을 한다는 핑계로 마루 앞에 거둬 올린 창을 모두 내렸다.


해가 저문 밤이라고 해도 정자집에 늦도록 머물게 할 수는 없었다. 비밀이란 오래 감출수록 더 잘 드러나는 법이었다. 그저 잠시 잠깐 홍이의 손을 잡고 몸을 더듬으며 애정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감질이 아니라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따라 날씨가 매섭게 추웠다. 어제까지도 포근했는데, 아침 일찍 외풍이 심해 눈을 떴다. 정자집은 여름엔 시원했지만 추위를 막아내는 데는 구실을 하지 못했다. 누비이불을 덮고 잤는데도 한기가 밀려왔다. 해가 뜨지 않은 밖은 어두컴컴했다.


일어나 덧옷을 껴입고 촛불을 켠 뒤 화로를 들쑤셨다. 참나무 숯을 몇 덩이 얹자 파란 불꽃이 일었다.


엉덩이는 뜨끈했어도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부삽을 잡은 손이 시렸다. 추위로 몸이 아려지니 허기가 몰려왔다. 요기꺼리라도 있을까 싶어 흐린 촛불을 향도 삼아 마루로 나왔다. 조심스레 발을 옮기는데 마당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굶주린 노루라도 내려왔나 눈을 돌렸더니, 거기 시커먼 사람의 형상이 버티고 서 있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누, 누구냐?"


촛대를 들이댔지만, 형상은 여전히 어두웠다. 형상이 마루를 올라와 쓱 다가왔고, 그제야 정체가 드러났다.


"흐흐흐, 도령님. 날씨가 찬디 벌써 기침하셨네예."


방자였다. 갑자기 기운이 다 달아났다.


"아, 자넨가. 휴!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이 시각에 어쩐 일인가?"
방자는 대답보다는 방 안 기색을 살피기에 더 분주했다.


"날씨가 추워졌기에 어찌 계시나 싶어 왔지예. 혼자신가 보네예?"


가슴이 뜨끔했지만 모른 척 눙쳤다.


"당연하지. 홍이는 엊저녁 일찌감치 집에 갔다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튀어나왔다. 방자가 은근히 한 술 더 떴다.


"추울 땐 곁에 사람이 있는 게 최고지예."


"그래. 춥긴 춥구먼. 한양 도성에서도 못 겪어본 기훌세."


애써 말머리를 들리니 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이 동짓달 열아흐레가 아닌가 베요. 오늘 내일은 겁나게 추울 겝니더."


"그건 또 뭔 소린가?"


"다 사연이 있지예. 왜란이 끝나던 무술년(1598년) 오늘 충무공께서 저 노량 앞바다에서 순국하셨더랬지예. 남해 사람들이 시신을 뭍에 올리고 다음날 발상(發喪)을 했는디, 이후부터 이 두 날만 되믄 추위가 기승을 부리지 않는가예. 충무공의 충렬(忠烈)이 돌아가시고도 흩어지지 않아 매운 기운 때문에 그러타꼬 나만은 어르신들이 말씸하시데예."


권문탁이 감탄하면서 말했다.


"그거 참 기이하기 짝이 없는 일이구나. 왜적에 대한 충무공의 분노가 얼마나 거셌으면 돌아가시고도 추위로 대신했을까. 그런 충무공의 돌보심이 여전하니 남해 사람들은 정말 든든하겠어."


방자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글씨, 고랬시믄 오죽이나 좋을까만, 근자 고을 돌아가는 꼴을 보면 충무공의 음덕도 바닥이 드러난 게 아닌가 싶네예."


권문탁도 조옹집이 자행하고 있는 패악질은 익히 알고 있었다. 매구패 구자효 상쇠 노인이 관아에 끌려간 날이 하필이면 홍이와 함께 보리암으로 떠나던 날이었다. 차상두를 통해 소식을 들은 권문탁은 치를 떨었다. 현령의 사주와 묵인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권문탁도 맥이 빠져 별 보탬도 안 되는 말을 던졌다.


"아무리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어도 해는 여전히 떠 있네. 곧 구름이 걷힐 날이 올 걸세. 상쇠 영감도 다시 꽹과리를 잡았다지. 그만 하기 다행이야."


"이러다 남해에 줄초상이 나지 않을까 걱정이지예. 그나저나 추위엔 뜨끈한 청주가 그만이지예."


방자가 품에서 술병을 꺼내더니 부엌에 들어가 데워 나왔다. 두 사람은 말린 물메기를 찢어 먹으며 술잔을 주고받았다.


이상하기는 날씨만이 아니었다. 늦게 뜨는 해가 마루의 그림자를 지웠는데도 홍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누구보다 재발라서 이른 걸음을 하는 홍이가 이리 늦은 적은 처음이었다.


"소인이 있는 걸 보고 내뺐나베요. 그런다고 주머니 속 송곳이 어디 가남."


술이 오른 방자가 희떠운 소리를 내뱉었다. 그럴 리 없는 걸 잘 아는 권문탁은 걱정이 앞섰다. 방자라도 보내려는 참에 대나무 숲에서 차상두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허위허위 달려왔다.


"상두, 니 웬일이고? 홍이가 오데 아픈가베?"


방자가 자리를 옮기며 물었다. 차상두가 고꾸라질 듯 마루에 오르더니 굳어진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외쳤다.


"도령님, 방자 형님! 제 아비가 관아로 끌려갔습니다. 새벽에 포졸이 들이닥치더니 다짜고짜 아비를 포승줄로 옭아매 잡아갔습니다."


술잔이 출렁거렸다.


"아닌 밤중에 뭔 홍두깨여. 덕구 영감헌티 환곡미를 들씌울 까닭도 없는디, 포졸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있남? 혐의가 뭐라던디?"


차덕구가 고개를 홰홰 저었다.


"엄니하고 홍이랑 같이 따라갔지만 관아 앞에서 쫓겨났어요. 지금까지 발만 동동 구르다, 홍이가 도련님 걱정하신다고 가보라 해서 왔습니다."


권문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넋 놓고 지켜볼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혈육의 정을 끊는다 해도 홍이 아비를 빼내야 했다.


서슬이 시퍼래진 권문탁을 보더니 방자가 일어나 만류했다.


"도련님, 도련님께서 나설 계제는 아닌 것 같네예. 지가 쌔이 댕겨올텐께 그마 여기 계시소."


손길에 눌려 권문탁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도저도 못하고 있는데, 방자가 차상두를 앞세우며 부리나케 집을 나섰다. 아스라이 멀어지는 두 사람을 지켜보면서 권문탁은 무력감에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이날 충격을 받기는 조옹집도 마찬가지였다. 환곡미의 실적이 목표치에 근접해 기분 좋게 관아에 들어섰는데, 심복 한 놈이 쭐레쭐레 오더니 차덕구가 피체(被逮) 된 소식을 귀띔해 주었다.


"뭐라고! 언놈이 내 명령도 없이 그딴 짓을 했다는 게냐?"


포졸이 언성을 줄이라는 손짓을 하면서 대꾸했다.


"고정하시지예. 현령의 엄명이 있었다네예."


믿기지 않는 변고였다. 현령이 무슨 억하심정으로 홍이 애비를 잡아들인단 말인가. 문득 지난 번 자신이 현령에게 일러바친 고자질이 떠올랐다. 무슨 조치를 취한다더니, 그게 이번 일과 연관이 있어 보였다. 그래도 납득은 되지 않았다.


그 길로 현령의 관사로 달려갔다.


"대감, 차덕구를 나포해 오라는 하명이 있었다 들었습니다. 어인 복안이신지요?"


관아 내부의 통문(通文)을 읽고 있던 현령은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네가 관여할 바 아니다. 내가 네게 일일이 보고할 위치더냐. 네 일이나 착실히 보거라."


냉담한 반응에 울화가 치밀었다. 숨을 몇 번 고른 조옹집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차덕구는 장차 소인에게 장인이 될 사람입니다. 무슨 죄를 졌는지 모르겠사오나 소인을 보셔서 용서해 주실 수 없으십니까?"


현령이 통문을 획 밀치더니 엄혹한 목소리로 조옹집을 꾸짖었다.


"장인? 어처구니가 없구나. 국법을 어기고 끌려온 죄인 놈을 네 마음대로 장인으로 삼아. 당치 않다. 썩 물러나거라."


현령이 단단히 작심을 하고 내린 명령이었다. 더 이상 대거리를 했다가는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꼴이었다.


"무슨 혐의인지나 알려 주십시오. 그래야 소인이 치죄(治罪)를 할 거 아니겠사옵니까."


마뜩찮게 조옹집을 흘겨보던 현령이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입을 열었다.


"그래. 치죄는 네게 맡겨야 할 터이니, 알려주마. 관아 장부를 점검하던 중에 두어 달 전 보관 중인 공금이 적지 않게 축난 걸 확인했다. 출납의 근거도 없이 어설프게 손실 처리가 되었던데, 아무래도 미심쩍어 아전을 불러 힐문했더랬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축이 난 공금은 웃돈까지 얹어 박태수가 나중에 들고 왔었다. 눈감아 달라는 입막음 돈이었다. 조옹집은 별 생각 없이 공금을 착복했다. 아전에게는 적당히 처리하라며 몇 푼 찔러주었다. 이미 사달이 난 돈을 다시 환급할 머저리가 어디 있는가. 그게 들통 난 모양이었다.


"그랬더니요?"


마른 침을 삼키며 조옹집이 물었다.


"아전 말이 분실했는데, 범인을 몰라 하는 수 없이 손실 처리했다는구나. 터무니없어 따져 물었더니 도난당할 무렵 차덕구가 몇 차례 관아를 들락거렸다기에, 그 놈이 범인임을 직감하고 잡아오게 한 게다. 그러니 네가 알아 치죄해 이실직고를 받아내도록 해라. 물고(物故, 심문 중 죄인이 죽는 일)가 나도 좋다."


진상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기가 막힌 모략이었다. 이 일을 빌미로 삼아 차덕구 일가를 섬에서 내쫓을 속셈이었다. 당연히 골칫거리인 홍이도 권문탁의 눈에서 사라질 터였다.


조옹집은 하늘이 노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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