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구만의 `동창이 밝았느냐…` 국민시조의 남해 창작설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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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만의 `동창이 밝았느냐…` 국민시조의 남해 창작설에 관하여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12.26 11:43
  • 호수 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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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 나의 삶 20 │ 碧松 감충효
碧松 감충효시인·칼럼니스트
碧松 감충효
시인·칼럼니스트

약천 남구만은 남해에서도 9개월여 유배생활을 하며 그 당시 우리 고향의 특산물 유자를 노래한 영유시(詠柚詩) 20수를 비롯해 등망운산(登望雲山), 등금산(登錦山) 등 주옥같은 시문(詩文)을 남겼는데 2012년 전후해서 그 당시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이며 한국유배문학연구소 소장이었던 박성재 씨는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의 시조에 대해 다양한 각도로 영유시(詠柚詩)와 비교분석하고 두 시와 시조의 관련성을 입증하였으며 서포 김만중과의 오고 간 서찰과 시문을 검토하여 남해 창작설을 주장함과 동시에 <시조>의 성립과 창작 배경을 분석하여 우리 고향의 지방신문에 발표하였고 마침 그 때는 재경남해군향우회지 룗남해가 그리운 사람들룘 2012년도 판을 발간할 즈음이라 이 책의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던 필자는 박성재 씨에게 원고 청탁하여 약천 남구만의 `시조` 성립과 창작 배경`의 글을 편집위원회를 통과하여 게재했다. 그의 연구물 상당한 양의 내용은 언급한 책자 528~531쪽에 실려 있으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박성재 소장은 "결국, 이 <시조>는 유자농사를 짓는 남해 농민들이 과도한 조세로 인해 핍박받고 있는 현지사정을 직시하고 목민관과 농민들에게 내린 엄정한 훈계라고 할 수 있다. 남해가 가지는 지정학적 지명의 심상에서 창작되어진 권농가(勸農歌)·독농가(篤農歌)가 바로 영유시(詠柚詩)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특히 그는 지명의 분석을 통해 남구만이 남해에 유배돼 유람하면서 썼던 영유시 20수 중에서 용문사 대웅전 소반위에 놓여있던 유자를 노래했던 시 등에서 볼 때, 용문사에서 동쪽으로는 앵강고개(재)를 넘어서, 성현을 지나면, 장전리[긴사래 밭]가 있다는 점은 <시조>가 남해 지명의 심상에서 창작됐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또한 `작개`라는 말은 노비보유자층이 노비에게 전답을 분급하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책임하에 경작케 하는 영농방법을 지칭하는 용어이고 `작개재`는 노비보유자가 노비에게 `작개`와 `사경`을 짝지어 나눠주고. 노비는 이것을 가족 노동력에 의거하여 경작하는 형태로 운영하는 토지경영방법이며 여기서 `작개(作介)`는 앵강만 고개 넘어 성현리[작개]를 지금도 `작개`라고 칭하고 있고 `작개`를 지나 `장전(長田)`이란 동네 즉, 사래긴 밭이 있다는 점이 재조명되어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필자 역시 박성재 씨의 연구물 중 지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어떤 자료를 찾아보니 이동면 평지 마을과 장전마을 사이의 들을 사창(社倉 : 국가의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들이라 부르고 있음을 알았다. 이 사래긴 밭 마을의 사창들을 지나다니면서 한 나라의 당상관 벼슬을 지낸 분이 농민의 애환을 몰랐을 리 없다.


더구나 유배객의 서글픈 심정으로 핍박 받는 농민의 심정을 그의 지성과 감성으로 이 시조를 창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짧은 남해유배기간 동안 약천은 총6제 28수를 남긴다. 남해를 무척이나 사랑했음이리라. 영유시 20수는 남해특산물인 유자를 선비에 비유하면서, 누구보다도 농심을 이해했으며, 그의 애민사상이 각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유자를 노래했으되 유자로 인한 농민들이 과도한 조세부담에 힘들어 하고 있음을 고도의 상징성과 은유의 기법으로 나타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작가의 이념적 세계, 정치적 풍자, 당시의 사회상, 남해의 특산물 유자에 얽힌 농민들의 조세부담에 대한 애환으로 음미해 보면 이 시조는 남해 창작설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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