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와 축제의 판, 언제까지 걸어가야 길다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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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와 축제의 판, 언제까지 걸어가야 길다워질까?
  • 남해타임즈
  • 승인 2020.01.02 10:55
  • 호수 67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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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국제탈공연예술촌의
1년을 돌아보면서

지난 2018년 4월, 탈촌의 문을 연 김흥우 선생님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희곡 작가이자 연극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선생은 수만 점에 이르는 연극과 영화, 민속 관련 자료들을 수집했고, 이것을 남해군에 기증하면서 탈촌이 존재하게 만들었다.


선생은 평소 다양한 시설이 들어선 명실상부한 `예술촌`이 남해에 자리하길 염원하셨다. 인프라의 측면에서 예술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남해에 군민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예술을 즐기기를 원하셨고, 또 소장품의 학술적 가치를 일구어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를 소망했다. 아쉽게도 선생의 소중한 꿈은 당신의 별세로 말미암아 잠시 걸음을 멈춰야 했다.


선생이 떠나고 계절이 두 번 바뀐 뒤 군에서는 새로운 촌장을 공모해 영입했다. 누군가 빈자리를 메우고 못다 이룬 유업을 이어가야 했으니 당연한 과정이었다.


2018년 탈촌의 행사는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준비한 일정대로 진행되었을 테니, 지난 2019년 탈촌에서 이루어진 행사들이야말로 새로 온 촌장의 역량과 안목을 확인하는 자리라 할 만했다. 많은 사람들처럼 김흥우 촌장님의 부재가 안타까웠고, 또 즐겨 탈촌의 공연이나 기획전을 관람했던 나는 흥미롭게 새 촌장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좋은 행사와 연구과제들이 이어지기를 기대했다.


2019년이 마감된 현재, 작년 탈촌은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을까? 탈촌은 군내 유일의 공연 전문 설비를 갖추었을뿐더러 전국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어떤 것은 유일하다고까지 할, 가치 높고 풍부한 소장품을 자랑한다. 예술이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것이니, 전임과 후임의 성과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지 않은 보수와 대우를 보장받는 촌장은 상징성으로나 잠재력, 실행력의 측면에서 여느 일반임기제공무원과는 위상이 사뭇 다르다.


작년 탈촌이 추진한 사업은 크게 셋으로 나눠질 것 같다. 매달 한두 차례씩 벌어지는 정기공연과, 7월부터 시작된 특별기획 전시전 `아시아 탈의 신비 그림자에서 찾는다`, 그리고 12월 21일에 선을 보인 극단 하모하모의 워크숍 공연 `호랑이가 된 효자`가 그것이다.


정기공연은 일반 연극 공연과 전통 음악 또는 연희의 공연이 주를 이루었다.


연극은 나도 대학 때부터 즐겨 보았고(김흥우 선생의 강의를 청강하기도 했고, 대학로에 돈도 많이 뿌렸다. 남해에 내려와서도 탈촌에서 공연되는 작품들은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빠짐없이 관람했다. 특히 김흥우 촌장님 계실 때 기획되어 공연된, 안톤 체호프의 소설을 연극으로 각색한 일련의 작품들은 정말 인상 깊었다. 서울서도 공연했겠지만, 지방의 군에서 그런 작품들을 보는 일은 큰 행운이었다.


전통 음악이나 연희 역시, 지금 내가 `고현집들이굿놀음보존회` 단원으로 풍물을 배우고 공연하고 있기에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남해만의 가락과 춤사위, 진법(陣法)을 익히는 일은 마치 남해가 내게 준 특혜 같았다. 그래서인지 전통 음악과 연희의 공연은 그런대로 나로서는 만족스러웠다. 특히 중요 무형문화재 `발탈` 보유자인 조영숙 선생님이 이끄는 일련의 프로그램은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연로한 나이에도 열정과 기량이 살아 있어 그 분의 식지 않는 예술혼을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연극으로 오면 어떨까? 솔직히 수준작이라 평할 만한 작품은 기억나지 않는다. 오히려 졸작(?)에 가까운 작품마저 있어 실망스러웠다. 봄에 공연한 `운수 좋은 날`은 작품의 창조적 재현보다는 내용과도 썩 어울리지 않는 유행가만 연신 불러대 집중을 방해했다. 나는 노래 교실에 온 게 아니었다. 여름 공연인 `검은방`은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참담했다. 대사가 잘 전달 안 되는 불편함이야 감수하더라도 종잡을 수 없는 연극의 진행과 뻔해서 충격적인 결말은 내가 왜 이런 작품을 보기 위해 시간을 써야 하는지 서글펐다. 정말 문제가 많은 공연이었다.


두 편의 가을 공연은 내가 바빠 보지 못했다. 12월 마지막 공연 `아름다운 여행길`은 나름대로 기대가 컸었다. 연극계에서 공인받은 배우이자 연출가, 극작가인 장두이의 작품이라 한 해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이 올라온 줄 알았다. 촌장도 작품을 소개하면서 올해 공연 중 가장 좋았다고 자평해 기대감을 북돋았다.
그러나 작품은 죽음을 앞둔 노인의, 말년의 감회와 결의를 감동으로 보여주겠다는 의도만 앞섰을 뿐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과정에 대한 설득력 있는 스토리는 보여주지 못했다. 웰다잉(well-dying)을 구호처럼 외치고 버킷리스트를 열거한다고 해서 관객들에게 죽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이끌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로서는 마치 보건복지부 정책 홍보 연극을 보는 듯한 생경함만 뒤끝으로 남았다.


전반적으로 작년 탈촌의 연극은 촌장의 작품에 대한 안목이 미진함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올해에 준비된 작품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니 나아질지 모르겠다. 촌장이 주로 민속극 연출을 해왔음을 감안하더라도, 갑자기 이 안목이 진일보할지는 두고 봐야겠다.


특별기획 전시전은, 그 팸플릿에 부탁을 받아 나도 글을 썼고 군내 신문에도 게재되었다. 중국의 그림자극인 피영(皮影)은 나도 소설을 쓰면서 트릭으로 채용해 본 것이라 우리 고유의 그림자극이 있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었다.


새로 2층 전시실을 리모델링하면서 개막식도 가졌고, 당일 `만석중놀이` 실연도 한 차례 있었는데(나는 보질 못했다), 유튜브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자료 화면들은 기대를 만족시키기에는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5개월이 지난 지금도 콘텐츠는 크게 변함이 없으니, `특별기획 전시`라는 이름이 조금 무색해진다. 너무 파천황을 기대했나 보다.


끝으로 극단 하모하모의 워크숍 공연은, 우선 당위적인 의미는 부여하고 싶다. 군내 주민들을 중심으로 단원을 모집해 8월 말에 결성된 극단은 나 자신도 단원으로 응모해 한동안 연습에 참여했었다. 우리 남해의 `집들이굿놀음` 안에도 연극적 요소가 있어 단원분들에게도 도움이 될 듯해 내가 나서 적극 참여를 권유했었다.


연극은 일종의 놀이 문화다. 내가 아닌 남이 되어 연기를 함으로써 타인과의 공감대를 넓히고 세계와 인간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전망을 확장하면서, 인간이 가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적 속성을 일깨우기에도 알맞아 역할극 등은 심리 치료에도 많이 활용된다. 그래서 아주 바람직한 기획으로 생각했었다. 더구나 우리 남해의 옛 전설을 바탕으로 작품을 꾸민다면 애향심과 자긍심을 높이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


나는 몇 가지 이유로 한 달 반 정도 연습에 나갔다가 그만두었다. 총연출을 맡은 촌장의 연극에 대한 소양과 지도는 나로서는 미흡해보였고, 덩달아 흥미도 줄어들어 아쉽지만 마음을 접었다. 당연히 내가 없다고 연습에 차질이 빚어질 리는 없었다. 이후에도 연습을 나가는 단원 분들을 통해 소식은 들었고, 좋은 결실이 맺어지기를 바랐다.


마침내 얼마 전에 첫 공연이 있었다. 나도 가서 아낌없는 박수와 꽃다발을 전했다. 공연에 참여한 배우 분들과 재능 기부한 스태프 분들의 노고는 그 무엇으로도 보상될 수 없는 값진 헌신이었다. 짧은 시간 준비를 했으면서도 연극에서 보여준 그 분들의 모습은 진정 아름다웠다. 서툴긴 해도 진정성이 담긴 연기는 그 분들의 삶에도 활기를 불어넣었을 것이다.


다만 의아한 일은 공연을 앞둔 한 달여 전부터 단원들이 거의 매일, 저녁에 나가 두세 시간씩 연습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물론 공연을 앞두고 연습량을 늘리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지만, 많은 준비가 안 된 단원들을 그렇게까지 다급하게 연습장으로 이끌어야 하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원들의 자발적인 열성이었다고 믿지만,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참가자들은 힘겨워지고 부담감은 배가 된다.


12월 안에 반드시 공연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라도 있었던 것일까? 누가 등을 떠밀진 않았을 것이다.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연습해 올해 3, 4월쯤 공연해도 늦을 건 없었다. 연극은 놀이의 일종이니 음미하고 저작하는 시간이 충분해야 연극에 참여하는 묘미를 만끽할 수 있다. 갑자기 재촉한다고 실력이 늘기는 어렵다. 더구나 여가 활동의 일환으로 호기심을 채우고 성취감을 얻기 위해 참여하는 초심자들에게는, 연극이 놀이가 아니라 노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 번 공연하고 말 것이 아니라 계속 흥미를 유지하면서 육체가 느끼는 몸과 말의 축제를 향유하게 하려면 과정이 느긋하고 여유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급히 먹은 밥은 체하기도 십상이다. 기왕에 시작한 일이니 극단이 규모 있고 발전적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하지만, 어딘가 이유가 모호한 조급함이 느껴지는 운영은 배제되어야 할 듯하다.


아울러 아쉬운 점은, 탈촌이 소장하고 있는 그 많은 자료들이 거의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 자료들은 우리 연극사와 영화사, 풍속사 등의 연구와 이해에 더할 나위 없이 값진 보물들이다. 이 자료들을 학술적으로 어떻게 보전하면서 홍보해 남해의 문화 품격을 제고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보인다. 자료란 자꾸 들춰보면서 활용해야지 그냥 쌓아두기만 하면 쥐(?)가 와서 파먹을 수도 있다. 더구나 수집한 김흥우 선생님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연극계와 영화계 관련 연구자들의 적극적인 연구 참여를 이끌어야 하는데 말이다. 내가 보기에 탈촌은 전임 촌장과 성급하게 거리감을 두려고 하는 듯하다.


지난 한 해 탈촌의 공연과 기획은 나름대로 성취가 있었지만,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탈촌이 면모를 일신해서 더욱 군민들의 호응과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기대한다. 너무 많은 시간만 주면 상황은 숙성되기보다는 부패해 버린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없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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