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나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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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나쁜 날
  • 남해타임즈
  • 승인 2020.01.02 11:07
  • 호수 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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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 숙본지 칼럼니스트
이 현 숙
본지 칼럼니스트

정장을 빼입고 약속장소를 향해 급히 가는데 한쪽 발에 뭔가 뭉클한 감촉이 느껴졌다. 짚이는 데는 있지만 설마 하며 발밑을 내려다본 순간 이미 수습 불가능의 난감한 사태가 벌어진 뒤였다. 똥 밟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짝다리로 앙감질을 뛰다가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서 주변을 둘러보자 일대가 똥밭이다. 졸지에 똥 더미에 갇혀 화들짝 놀라 깨어 보니, 한바탕 꿈이었다.


`똥꿈`은 길몽이다. 더군다나 이 정도의 질척함이면 누구라도 탐낼 만하다. 신라 장수 김유신의 누이 가운데 문희는 언니 보희의 꿈을 사서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부인이 되었다. 하지만 요즘 시대에 꿈을 사고파는 것은 가당찮은 일일 테니 꿈으로 돈벌이할 생각은 일단 접어야겠다. 그러면 로또라도 한 장 사는 게 꿈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그런데 `無故而得千金 不有大福, 必有大禍`, 이유 없이 얻은 재물은 복이 아닌 화라 했다. 소동파의 금언을 늘 가슴에 새기며 살아왔기에 아쉽지만 로또에 대한 환상도 버려야 할 것 같다.


하여간 운수대통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은 일진을 암시하는 예지몽인 것만은 분명하다. 덕분에 산뜻한 기대를 품고 하루를 시작했건만, TV 뉴스를 보면서 아침 댓바람부터 기분이 언짢아졌다. 부동산 정책을 비웃기라도 하듯 서울과 수도권을 규제하자 지방의 중소도시로 몰려온 투기꾼들이 매물로 나온 아파트를 싹쓸이한다는 것이다. 한쪽을 누르면 반대쪽이 불거지는 풍선효과인 셈이다. 저승길에는 동전 한 닢도 가져갈 수 없거늘 그런 이치를 모르고 저러는지 아니면 알고도 저러는지, 인간의 탐욕 앞에 왠지 씁쓸하다.


찜찜한 기분을 먹는 거로 해소해 볼 요량으로 오전 내내 주방에서 점심 특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이윽고 후각과 침샘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닭갈비 요리가 완성되어 불을 끌 타이밍만 노리던 차에 느닷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아뿔싸, 주방을 떠났다 되돌아온 잠깐 사이 고기가 바짝 졸아들다 못해 아예 냄비 바닥까지 군데군데 까맣게 타 버렸다. 식겁하여 냄비를 들어내다 그만 달궈진 냄비에 손까지 데였다. 주택 태양광을 설치하라는 상업용 전화를 매몰차게 끊었어야 했다.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마치고 오후 들어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펼친 채 문서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인가. 의도치 않은 클릭 한두 번에 한 묶음의 문서가 눈앞에서 증발해 버렸다. 몇 해 전 `문서 실종사건`을 겪고 며칠간 식음을 전폐한 일이 있는데 오늘 똑같은 실수를 재현한 것이다. 그때도 단 1초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10년 이상 애지중지 수집하고 기록한 전공 관련 자료가 한순간에 삭제되었다. 그 뒤 모든 문서는 하드 디스크에 이중으로 저장한다. 다만 유일하게 오늘 날려 보낸 파일만은 매일 손본다는 핑계로 별도 저장하지 않았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고, 세상사가 참 얄궂다.


너무도 황망하여 반쯤 넋을 놓고 있자니 밖에서 웬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후다닥 뛰쳐나가자 우리 집 개가 열린 대문 틈으로 탈출해 골목 밖으로 신나게 내달리고 있었다. 사고 치지 않고 이내 무사히 돌아와 천만다행이었지만, 개를 쫓아가다 얼마 전에 다친 무릎을 모퉁이 돌에 세게 부딪쳤다.


잠자리에 들기 전, 유난히 운수 사나웠던 하루를 돌아본다. 똥꿈이 개꿈임을 몸소 증명하느라 평소보다 몇 배 더 고단했다. 하지만 삶의 진정한 의미나 가치를 곱씹는 기회가 된 것도 사실이라 어쩌면 행운의 하루였는지도 모른다. `꿈보다 해몽` 아닌가.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의 주인공인 김 첨지 역시 우여곡절 많았던 하루의 끝에서 이와 비슷한 깨달음을 얻었으리라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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