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져진 것이 돌만은 아니니 | 11장 구름에 가려진 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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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져진 것이 돌만은 아니니 | 11장 구름에 가려진 땅2
  • 남해타임즈
  • 승인 2020.01.17 15:04
  • 호수 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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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시(辰時, 오전 7~9시) 무렵 관아에 들어가니 현령이 박태수를 찾았다. 어제 차덕구를 잡아들인 소식을 들은지라 풀어주라는 하명이라도 떨어질까 싶어 급히 처소에 들었다. 현령은 조옹집과 함께였다. 조옹집은 벌레 씹은 표정을 지으며 박태수를 외면했다.

 "차지셨십니꺼?"

 현령은 탁자에 놓인 장부를 탁탁 치면서 떨떠름하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사뭇 아니꼽게 조옹집을 흘겨보았고, 그때마다 조옹집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몸을 움츠렸다.

 "앉게. 조 포교가 사고를 쳤어."

 박태수가 조옹집에게 눈길을 돌리자 대들 듯이 눈길을 받았다.

 "사고라니 무신?"

 "심문하던 죄인을 물고내버렸네. 일이 복잡하게 됐어."

 "물고? 누굴?"

 차덕구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거 유배 온 죄인 있잖은가? 살살 족치면서 연루자를 캐랬더니 그예 목숨을 앗고 말았네."

 뒤집힌 속을 내색 않고 앉아 삼켰다.

 "의원은 내가 잘 구슬려 놨으니 적당히 병사로 처리하게. 감영에 알려지면 검시를 한다며 법석을 떨 테니 입단속 잘 시키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시신이라도 잘 모셔 장례를 치러야 했다.

 "시신은 어쩔까예?"

 "벌써 멍석에 말아 집 앞 마당에 던져 놨네. 포졸 몇이 지키고 있으니 아무도 접근하진 못할 걸세. 무슨 사달을 벌일지 조 포교를 믿을 수 있나. 자네가 뒤처리 잘 하게. 그럼 난 자네만 믿네."

 현령과 조옹집이 싸 놓은 똥이 그의 몫으로 떨어졌다. 잠시 조옹집을 째려보다 방을 나왔다. 그렇게 하루를 문서 처리로 다 보냈다. 조옹집은 얼굴 한번 비추지 않았다.

 신시(申時, 오후 3-5시)가 달아날 무렵 박태수는 뒤로 돌아보지 않고 관아를 빠져나왔다. 차덕구의 집에 가볼까 하다가 그 집 식구들 볼 면목이 없어 발길을 돌렸다. 뭔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옥진의 주점에 이르자 문을 밀쳤다. 저녁 손님 맞을 차비로 바쁜 주점의 문은 닫혀 있었다. 평소와 달리 박태수는 평정심을 잃고 문을 마구 흔들었다. 문을 걷어차기 직전에야 문이 흔들렸다.

 털조끼를 입은 옥진이 얼굴을 빼꼼 내밀더니 박태수를 확인하자 어이없다는 듯 눈초리를 세우며 쏘아붙였다.

 "서방질한 마누랄 덮친다 해도 이리 소란스럽진 않으리다. 어련히 문을 열까 난리북새통이요?"

 박태수는 대거리도 않고 휑하니 내당으로 들어갔다. 고무신을 끌며 옥진이 종종걸음으로 뒤따랐다.

 박태수는 어디서 집어 들었는지 한손에 술병을 쥐고 있었다. 보료에 앉자마자 벌컥벌컥 깡술을 들이켰다.

 "선불 맞은 노루가 따로 없소. 내 쌔이 주안상 봐올 테니 제발 엉덩이부터 착실히 앉히소."

 그러나 옥진이 일어날 틈도 없이 박태수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임자. 시방 그럴 경황이 없어여. 내 말부텀 잘 듣소. 집에 금붙이가 얼마나 있는감?"

 엉덩방아를 찧을 뻔하다 간신히 몸을 추스른 옥진이 박태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어디서 급전이라도 썼소?"

 박태수가 방문을 열고 밖의 동정을 살피더니 다시 앉아 귓속말로 속삭였다.

 "군소리 말고 금붙이로 바꿀 수 있는 물건은 모두 챙겨여. 아무래도 남해로 떠야 할 듯혀. 그러니 갤차주는대로 칼끄시 정리하소."

 옥진이 말문이 막힌 듯 멍하니 박태수를 바라보다 정신이 돌아온 듯 박태수의 손을 쥐었다.

 "혹여 내 일이 들통 난 게요?"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박태수가 눈길을 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누가……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일을……."

 "조옹집이 알아챘어. 시방이야 사소한 겁박이나 했쌌지만 갤국엔 다 뽈아묵어야 물러날 게여. 아니 관아에 고발이나 안 하믄 다행이제."

 기운을 잃은 옥진이 팔베개에 간신히 몸을 기대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박태수는 곰방대를 꺼내 불을 붙이고 연신 담뱃대만 빨아댔다.

 한참 만에 옥진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십여 년 전 노량 바다에 몸을 던졌을 때 난 이미 죽은 목숨이었소. 당신이 건져내 이렇게 덤으로 산 인생이지만, 당신 은혜로 모린다믄 내가 우찌 사람이겄소. 냄들은 백 년 살아도 못 누릴 행복을 당신 덕에 다 누리씨니, 인자 내가 보답할 차롄갑소. 당신이 왜 나고 자란 고향 남핼 뜨요? 내 가서 자현하리다."

 말을 마칠 쯤 옥진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였다. 지난 십년 동안 쌓인 회한이 한 줄기 눈물이 되어 떨어졌다.

 박태수가 옥진의 어깨를 힘껏 잡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조용히 이곳만 뜨면 더 탈은 없으리다."

 옥진이 허탈하게 말했다.

 "어디 간들 조옹집 같은 이가 없겄소? 조선 팔도를 다 떠돌아다닐 심산이요? 이제 그만 나도 쉬고 싶어요."

 "온밥 먹고 쉰밥 먹은 소리 집어치라니까. 어제 홍이 아비가 옥에서 조옹집에게 맞아 죽었소. 그 미치갱이가 또 먼 짓을 할지 몰라. 이 주점 사겠다는 치가 있다ㅤㅋㅔㅆ제? 헐값으로라도 당장 팔아치우소."

 옥진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불쌍한 노인을 왜?"

 "그걸 따질 계제가 아니라케도, 어여……"

 말을 이으려는데 밖에서 곱단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님. 관아 조 포교님께서 오신는디요. 우찔까예?"

 옥진이 몸을 부르르 떨며 박태수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벌써 잡으러?"

 "그럴 린 없을 거여. 시방 지 코가 석 잔디. 내 나갈 볼 텡께 쌔이 주점 팔 궁리나 하소."

 조옹집은 주점 손님방에 주저앉아 있었다. 얼굴이 썩은 송장처럼 문드러져 있었다. 온갖 포악질을 다 해댔어도 제 손으로 사람 죽이기는 처음일 터였다.

 박태수를 흘낏 보더니 독주 한 사발을 그대로 들이켰다.

 "조 포교. 너무 상심마시게. 자네가 부로 그랬나, 실수제."

 조옹집이 멧돼지 같은 얼굴을 들어 박태수를 쏘아보았다. 두 눈에 벌겋게 핏발이 서 있었다. 제 딴엔 고통이 심했는지 머리가 반백이 되어 있었다.

 "마음에도 없는 위로 때려치우고, 내 말 잘 들어. 사람까지 죽인 놈이 뭐가 무서울까. 나도 이판사판이야. 이게 내 마지막 통보니 귀담아 들어. 보름 안에 이 주점 내게 넘겨. 그 뒈진 영감탱이 일만 수습되면 들어올 테니까."

 다시 독주를 한 사발 따르더니 쿨쿨 목구멍이 터져라 처마셨다. 흘린 술을 손등으로 닦으며 독기 품은 눈으로 마음에 숨긴 말을 뇌까렸다.

 "그리고, 홍이 년과 뒹굴 일은 물 건너갔으니, 딴 년이라도 품어야겠어. 옥진이는 여기 두고 나가. 십 년 넘게 재밀 봤으니 내게 물려줘도 아쉬울 건 없겠지."

 박태수의 눈에 핏발이 섰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 혀도, 말은 가려 허게. 우찌 고런 미친 소릴 하는감?"

 "안 미쳤으니까 이 정도로 봐주는 거야. 진짜 미친 짓 하기 전에 순순히 따르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걸."

 마지막 사발을 비운 조옹집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박태수가 뒤따라 나갔지만, 조옹집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주점을 나가버렸다. 어느새 밖은 어두컴컴해졌다. 방에 들어가 비수를 챙긴 박태수가 조옹집의 뒤를 밟았다.

 조옹집은 성안을 돌아다니며 갖은 행패를 부렸다. 우마차가 가로막자 육모방망이로 소 대가리를 쳐 수레를 뒤집어놓았다. 순라를 도는 포졸들을 붙잡더니 이유도 묻지 않고 뺨을 후려쳤다. 주막에서는 남이 따러 둔 술을 빼앗아 마시고, 시비가 붙자 술상을 엎어버렸다. 고함을 지르며 육모방망이를 휘두르는 그를 막을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현달이 먹구름에 가릴 즈음에야 조옹집의 패악질은 끝이 났다. 아무도 주변을 얼쩡대지 않았다. 

 조옹집이 성 안 외진 곳에 있는 제 집에 들어갈 때까지 박태수는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밟았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이루어진 미행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조옹집이 방에 들어가 방문이 닫히고 불이 꺼졌을 때, 박태수는 자신이 무얼 하기 위해 그의 뒤를 따랐는지 설명해야 했다. 품안에 숨긴 비수의 손잡이를 만지면서 그는 멈칫거렸다. 칼날의 섬뜩한 예리함이 손끝을 스쳤다. 피가 맺힌 손가락을 빨면서 박태수는 그제야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았다.

 조옹집의 입을 막아야 했다.

 사람을 겁박하고 살해하면서도 눈도 꿈쩍하지 않는 그는 만인의 안전을 위해 사라져야 했다. 그러나 그런 대의(大義)로 보면 자신 역시 사라져야 할 인간 중 하나였다. 자신 역시 양심을 저버린 짓을 했었다. 조옹집에게 침을 뱉을 자격은 없었다.

 박태수는 솔직해져야 했다. 조옹집은 박태수 자신의 안전을 위해 죽어줘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옥진이가 있었다. 차가운 노량의 바다에 뛰어들어 흐느적이는 그녀의 허리를 잡았을 때 옥진은 그가 살아야 할 유일한 이유가 되었다. 옥진의 허물은 모두 자신이 짊어지기로 하늘에 맹세했었다. 딸 홍이를 지키려고 발버둥 치다 죽은 차덕구처럼 박태수는 아내 옥진을 지키다 죽어야 할 책임이 있었다.

 비수를 빼어든 박태수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조옹집의 집을 향해 야금야금 발걸음을 옮겼다. 백 걸음. 오십 걸음. 그가 죽여야 할, 옥진이를 위해 죽어줘야 할 몸뚱이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서른 걸음을 앞두고 있었을 때 박태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거친 숨소리였다. 그 자는 자신의 몸을 감추려고 하지 않고 조옹집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의 모든 감각은 방 안 조옹집에게로만 집중되어 있어 바로 코앞에 있는 박태수도 느끼지 못했다.

 그 자는 소음조차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누구의 귀도 거스르지 않았다. 목숨을 버리고자 하니 세상의 모든 장애에서 자유로워졌다.

 문이 열렸다. 그는 문을 닫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조옹집의 코 고는 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어둠에 익어지고 사람이 움직임을 멈추자 그 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차상두였다.

 차상두는 굵은 나무 몽둥이를 들었다. 누워 있는 조옹집을 내려보며 두 손으로 몽둥이를 바투 잡고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마지막 일격을 위한 결심이 폭발되기만 기다렸다. 그 시간이 박태수에게는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내리쳐! 어서 죽여 버려!`

 박태수는 속으로 차상두를 일격으로 떠밀었다. 자신도 모르게 비수의 손잡이에 힘이 들어갔고 몸이 움찔거렸다. 그 서슬에 박태수의 비수가 마루를 찍었다.

 팍!

 짧지만 날카로운 소리가 차상두를 주저하게 만든 끈을 끊어버렸다.

 몽둥이는 단단하면서도 확고하게 조옹집의 머리를 겨누며 떨어졌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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