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져진 것이 돌만은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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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져진 것이 돌만은 아니니
  • 남해타임즈
  • 승인 2020.01.31 17:22
  • 호수 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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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리 1 │ 임종욱 작가

박태수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몸은 온통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아직 동이 트기까지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새벽이 머지않은 때였다. 조옹집과 한 바탕 난리를 치르고 뛰쳐나간 것을 알고 있던 옥진 역시 꼬박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기 무신 꼴이요? 조옹집과 밤새 드잡이라도 한 게요?"
옷매무새가 헝클어지고 머리카락이 산발(散髮)에 가까운 박태수를 본 옥진이 기겁을 하며 물었다. 눈마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박태수는 대답할 힘도 없다는 듯 사방을 흘낏 살피고는 바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옥진이 따뜻한 꿀물을 데워 가져왔다. 박태수는 뭐냐고 묻지도 않고 빼앗듯 사발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찌 된 영문인지 말씀이나 시원하게 해보시요. 누굴 말려 죽일 셈이오?"
옥진의 채근에도 박태수는 고개만 저을 뿐 말을 잇지 않았다.
굳이 지난밤의 흉행(兇行)을 옥진이 알 필요는 없었다.
지난밤. 뭔가가 퍽 터지는 소리가 들렸을 때 박태수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마음속의 재촉과 죄악에 대한 공포가 그의 마음을 찢어놓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방에서 몽둥이 떨어지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렸고,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양 박태수는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도 방 안의 광경은 대낮처럼 환하게 눈에 들어왔다. 몽둥이를 내버린 차상두는 벽에 몸을 붙인 채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제 손으로 저지르고서도 자신이 한 짓이라고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차상두는 두 손을 들어 제 얼굴에 비춘 채 벌벌 떨었다.
박태수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조옹집의 머리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 내렸다. 그가 본 차덕구의 시신과 똑 같았다. 조옹집의 황소만한 눈이 잡아먹을 듯 박태수를 향하고 있었다. 죽음 직전의 발악 때문인지 조옹집의 입에서는 토사물이 흘러 내렸다. 그 요사스런 악취가 밖에서도 맡아질 듯했다.
먼저 냉정을 되찾은 건 박태수였다. 그는 우선 사방을 살폈다. 이 야밤에 차가운 어둠을 뚫고 기찰을 피해 돌아다닐 사람은 없겠지만, 범죄자의 당연한 심리였다. 누구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도 불안해 박태수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궜다. 비수는 칼집에 꽂아 허리춤에 간수했다. 퍼렇게 질려 있는 차상두의 뺨을 모질게 후려쳤다. 두어 대를 맞고서야 차상두의 맥 풀린 눈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포, 포교 나리……."
그 말과 함께 차상두가 털썩 주저앉았다. 성격이 거칠다고 해도 아직 어린나이였다. 굳이 살인을 저지른 사실을 되새겨줄 필요는 없었다. 박태수는 차상두의 눈을 가리고 조옹집의 상태를 살폈다. 귀를 대 보니 절명한 게 분명했다. 깨진 머리 사이로 흐르는 피만 봐도 알 만한 일이었다. 이불을 꺼내 조옹집을 덮었다.
"제가, 제가 저 자를……."
차상두가 더듬거리며 억지로 말을 끄집어냈다. 제 아비를 죽인 원수에게 복수한 것이지만, 사람을 죽인 사실이 바뀔 리 없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덜덜 떨렸다. 박태수는 곰방대에 담배를 쑤셔 넣고 불을 붙여 차상두의 입에 물렸다. 독한 담배 연기가 차상두의 마음을 가라앉혀 줄 터였다.
차상두는 기침을 캑캑거리면서도 연신 곰방대를 빨았다. 마치 그 일이 자신을 이 끔찍한 현장에서 벗어나게 해 줄 유일한 출구라도 된다는 듯 필사적이었다. 그 사이 박태수는 수습할 묘안을 찾아 헤맸다.
당장 날이 새면 조옹집은 관아로 나가야 했다. 차덕구 영감의 문제가 마무리되지 않았으니, 현령이 그와 조옹집부터 찾을 것이었다. 조옹집의 부재를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는 차후의 문제였다. 우선 시체부터 감추어야 했다. 이 비대한 덩치를 숨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옹집의 집 뒤란에 있는 광이 떠올랐다. 조옹집이 횡령한 물건과 금전 따위를 갈무리하는 장소였다. 도난을 염려해 튼실하게 지었고, 자물통 역시 묵직했다. 박태수는 이불을 조금 들춰 조옹집의 허리춤을 더듬었다. 다시 어둠이 몰려와 헛손질이 이어졌다. 그러다 구리로 만든 열쇠가 쥐어졌다. 어찌나 단단히 묶어놓았는지 뜯기지도 않았다.
비수를 뽑아 되는대로 찔러 넣어 열쇠를 빼냈다. 차상두를 방문 쪽으로 끌어냈다. 차상두는 다 타버린 곰방대를 지치지도 않고 빨아댔다. 다시 한 번 차상두의 머리를 쳤다.
"잘 들으래이. 조옹집은 죽었어야. 다시 살릴 길은 없으니께 우리가 살 길을 찾아야혀. 집 뒤에 광이 있응께 이 눔부터 그리 옮기자구. 알것냐? 억수로 무거운 눔이니께 함께 옮겨야혀."
차상두도 이제 갈피가 잡혔다. 머리를 흔들며 박태수의 손을 잡았다.
"그럴 필요 없어요. 날이 밝으면 자현하겠습니다. 아비를 죽인 원수를 죽였으니 정상참작이 될 거예요."
차상두는 물정 모르는 흰소리를 늘어놓았다.
"벅시 같은 소리 집어쳐여. 니 집 식구들 다 직일 참이가? 니가 직있지만, 나도 공범이나 마찬가지여. 니 집도 살고 내도 살 궁리를 해야혀."
어머니 윤점이와 홍이의 얼굴을 떠올랐는지 하상두의 눈에는 다시 절망이 가득 찼다.
"어떻게 살 수 있나요? 당장 들통이 날 텐데. 아, 아!"
박태수가 울음보가 터질 것 같은 차상두의 입을 막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녕은 있는 벱이여. 일단 며칠이라도 시간을 벌어 구녕을 맨들어야제. 정지에 가면 새끼가 있을 거여. 있는 대로 다 들고 와. 어여, 쌔이."
박태수가 차상두의 등을 떠밀었다. 차상두가 어둠을 더듬으며 정지 문을 열고 나갔다. 솔갱이가 여즉 타고 있는지 정지는 벌건 불빛으로 어려 있었다.
그 사이 박태수는 이불을 펼치고 조옹집의 시체를 얹었다. 안 그래도 큰 덩치가 시체가 되니 배는 무거워졌다. 이불에 눕히자 부릅뜬 조옹집의 눈이 번쩍였다.
고우나 미우나 10년 넘게 고락을 같이 했던 사람이었다. 오래 전 부임한 현령을 따라 남해로 들어왔다가 현령이 갈렸는데도 남해에 그대로 남았다. 현령의 뒷배로 포교가 되었고, 궂은 일 마른일을 함께 헤쳐 왔었다. 자신의 업보로 황천길을 자초했지만, 한 사람의 죽음 앞에 심경은 착잡했다.
박태수는 조옹집의 눈을 감겼다.
"조 포교. 극락왕생허여. 내세에는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시고."
이불을 겹쳐 둘둘 말았다. 부피가 산더미만 해졌다. 마침맞게 차상두가 새끼를 갖고 들어왔다. 새끼를 두 겹으로 엮어 이불을 모질게 묶었다. 박태수는 손에 묻은 핏자국을 이불에 문질러 닦아냈다. 이것으로 애증으로 얽힌 조옹집과의 인연을 매조지하는 기분이었다.
광으로 향한 쪽문을 열어 조옹집을 옮겼다. 둘이 들어도 힘이 부쳤다. 흐르는 땀을 훔치며 광문을 열었고, 가장 후미진 곳에 이불더미를 놓았다. 궤짝을 들어 이불더미를 숨겼다.
얼핏 봐도 저 뒤에 차가운 시신이 있으리라고 아무도 짐작할 수 없을 듯했다. 광문을 든든히 채워두면 잡인의 출입은 없을 터였다. 혹여 포졸을 풀어 집안을 뒤지더라도 어차피 그 지휘는 박태수의 몫이었다.
두 손을 털면서 광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재물에는 악착같은 구석이 있어 광이 허술하지는 않으리라 여겼지만, 조옹집은 정녕 알뜰하게 재산을 모아 두었다. 자물통이 채워진 궤가 눈길을 끌었다. 조옹집의 허리춤에는 열쇠가 하나뿐이었다. 저 궤의 열쇠는 다른 데 숨겨두었겠지만, 찾을 시간은 없었다. 옆에 굴러다니는 돌을 집어 내리쳤다. 의외로 쉽게 뜯겨나갔다.
궤 안에는 돈이며 금붙이, 은붙이가 차곡차곡 잠을 자고 있었다. 박태수가 찔러준 돈도 한 자리 차지했으리라. 그 돈 때문에 이 모든 사달이 시작되었다. 죽음을 부르는 재물이라니, 환멸이 일었다.
금붙이만 골라냈다. 남해를 뜨자면 당장 이것들이 필요했다. 주점이 수일 내 팔리기도 수월찮았고, 갑자기 융통하다 보면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다. 헝겊 주머니 안에 되는대로 밀어 넣었다. 옆에서 차상두가 그 광경을 겁먹은 얼굴로 흘겨보았다. 주머니 두 뭉텅이를 그에게 안겼다.
"이거 받아둬. 시방부텀 뒤로 돌아보들 말고 집에 가 있어여. 요놈 잘 숨겨둬. 이젠 죽으나 사나 우린 남해를 떠야혀. 평안도까정 우리를 싣고 갈 배를 마련해야 되는디, 이것이 긴요하게 쓸일 거여. 알것제?"
차상두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평안도는 왜요?"
답답한 소리였다.
"몰라 물어. 시방 거기서 홍경래란 작자가 반란을 준비 중이여. 신분 차별 없는 새로운 시상을 만든다더만. 우리가 살 곳은 거기밖에 없어야. 시상이 바뀌어도 돈까정 없어지것능가. 금은보화는 최대한 챙겨가야 묵고 살제."
그제야 차상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옹집의 집 앞에서 둘은 바로 갈라서지 않았다. 성문이 잠겨 있으니 차상두의 재주로 나갈 순 없었다. 비상시에 쓰이는 작은 문이 있었다. 그 열쇠는 박태수가 관리하고 있으니, 열어줘야 했다.
어두운 곳만 밟으며 그럭저럭 차상두를 내보냈고, 멀리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차상두를 확인하고서야 발길을 돌렸다. 두 사람과 마주친 이는 없었지만, 어느 귀신이 봤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시 정신을 현실로 돌린 박태수가 옥진의 손을 잡았다. 옥진의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돋을 것만 같은 옥진의 눈을 보니 너무나 가여웠다.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여자였다.
"잘 들으시게. 주점 파는 일은 너무 초초헌 기색을 드러내선 안되여. 주인이 나타나도 헐값에 넘기지 말고 최대한 이윤을 붙여. 그라고 땅이나 집 말고 양이 적은 보석들로 받아. 왜 파냐 묻거든 이제 좀 편히 쉴까 싶어 그린다고 둘러씌우고. 알것는감?"
박태수의 옷깃에 묻은 핏자국을 본 옥진은 대강 사태를 짐작했다. 차마 그 내막을 입에 올릴 순 없었다.
"우선 옷부터 갈아입으시오. 그리고 잠시라도 눈을 붙여요. 관아에 나가봐야잖것소."
옥진이 옷장을 열어 잘 다려놓은 포교 군복을 내어주었다. 잠시 나갔다 오더니 더운 물 한 동이를 안고 왔다. 수건에 물을 적셔 대충 몸을 닦았다. 깡말랐지만 근육으로 다져진 박태수의 몸에서 더운 김이 날렸다. 옥진이 박태수의 벗은 몸을 닦으면서 말했다.
"내 낭군, 몸도 참 실하요. 내가 떡두꺼비 같은 자식이라도 낳아 주었으면 얼매나 좋았실꼬? 이 년의 죄가 크요."
전 남편에게서 당한 매질 때문에 옥진은 아이를 갖지 못했다. 그게 못내 죄스러웠는데, 남편의 잘 빠진 몸을 보니 자식 생각이 간절해졌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 두 사람은 잠시 한 이불에 누워 잠을 청했다. 며칠 남지 않은 남해의 밤이었다. 두 사람은 해가 산봉우리를 붉게 물들일 때까지 서로의 몸을 뜨겁게 탐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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