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목욕탕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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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목욕탕 예찬
  • 남해타임즈
  • 승인 2020.01.31 17:24
  • 호수 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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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숙 │ 본지 칼럼니스트
이   현   숙
이 현 숙

솔직히 아주 어려서는 대중목욕탕 방문이 성가시기만 했다. 욕탕 출입문을 여는 순간 그 안을 가득 메운 수증기와 열기에 압도되는 느낌부터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게다가 온몸에 쏟아지는 깔깔한 `이태리 타올` 세례를 피할 재간이 없었다.
대중탕에 단독 입문한 시기는 중학교 입학 무렵이다. 입문 초기에는 비누칠만 거푸하며 요령 없이 깨작거리다가 집에 돌아오면 꼭 본전 생각이 났다. 비록 완성도는 떨어져도 혼자 힘으로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에 득의만면하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다. 그 후 목욕의 참맛은 대중과 함께하는 데 있다는 신념 아래 대중탕 예찬론자로 변신했다.
대중탕의 매력은 몽환적인 분위기에 있다. 큐브 모양의 타일로 장식된 다소 폐쇄적인 느낌의  그 공간은 늘 희뿌연 수증기에 휩싸여 있었다. 실내 조명등도 그물그물한 삼십 촉짜리 백열등 몇 개가 전부였다. 물체는 죄다 두루뭉술하게 보이고 사람들의 행동은 더듬적더듬적 굼뜰 수밖에 없었다. 전기세를 아끼려는 주인장의 꼼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역설적으로 그 음습함이 대중탕 특유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후끈 달아오른 열기, 자옥한 수증기, 욕조에 떠다니는 땟국수, 바닥에 굴러다니는 빈 우유 곽과 요구르트 용기, 빨랫감 치대는 소리, 빽빽대는 아기 울음소리, 엄마가 떼쟁이 아들 녀석의 엉덩짝을 응징하는 찰싹찰싹 찰진 소리, 텀벙텀벙 물소리, 이 모든 형상과 소리가 대중탕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풍경이 되었다. 또한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저편에서 아른거리는 여체는 신비감마저 자아냈다. 공공장소라는 사실도 잠시 잊은 듯 의외의 대담한 포즈로 때 밀기 삼매에 빠진 그녀들의 몸짓은 마치 우주공간에서 느리게 유영하는 우주인을 연상케 했다. 목욕을 갓 마친 여인의 발그레 상기된 뺨을 보면, 목욕하는 여인을 경쟁적으로 화폭에 담았던 오귀스트 르누와르· 에드가 드가· 도미니크 앵그르· 폴 세잔· 렘브란트 판 레인· 폴 고갱· 카미유 피사로 같은 화가들의 창작 혼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다.
이때 욕탕 한편에서는 `세신사`의 현란한 때밀이 신공이 펼쳐졌다. 때밀이용 침대에 고객을 눕히고 이짝저짝 돌려가며 구석구석 매만지는 섬세한 손길에서 왠지 모를 경건함이 묻어났다. 목욕 전문가의 관리 대상인 몇몇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품앗이로 등을 밀었다. 타인에게 잠시 몸을 맡기는 게 뭐 그리 대수로울까 싶어도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나저나 목욕을 마친 뒤 밖으로 나와 찬 공기를 한 모금 훅 들이켰을 때의 청량감이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안다.
대중탕의 매력에 한번 빠진 뒤로는 주 1회 목욕탕 나들이를 멈출 수 없었다. 여름철 비수기에 동네 목욕탕이 휴업에 들어가면 목욕용품을 싸들고 타동네 원정도 불사했으니까. 대중탕에 집착하다시피 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푼돈을 투자하여 피부의 노폐물을 시원스레 배출시키는 경제적 효용가치에 반했음은 물론이려니와 영혼의 찌꺼기까지도 말끔히 씻어 내고픈 순수한 욕망의 발로였다고나 할까. 하기야 일부 고객은 때를 미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허물을 벗고 한 마리의 나비가 될 기세였다.
대중탕은 화장실과 더불어 완전한 자유와 평등이 허락된 장소다. 관복 색깔로 신분을 구분하는 시대도 아닌데 하물며 나신 앞에서 그 무슨 수식어가 필요하며 상하 귀천을 따질 것인가. 심신의 고단함을 달랠 공간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 시절의 서민들에게는 큰 위로였다. 대중탕의 옛 풍경을 떠올릴 때면 소박한 낭만과 그리움에 물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용객들의 강력한 지지가 있었기에 단속반에 의해 위생상의 하자가 적발되더라도 대중탕이 폐쇄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대중탕만은 언제까지고 서민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 건재할 줄 알았건만, 진즉 사양의 길에 접어들더니 지금은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문득 생뚱맞은 아이디어 하나가 떠오른다. 올해만큼은 각자가 사는 동네의 공중탕에서 한해의 첫출발을 시작하자! 목욕재계하면서 신년 각오도 다지고 덤으로 흘러간 추억을 소환해 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듯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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