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져진 것이 돌만은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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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져진 것이 돌만은 아니니
  • 남해타임즈
  • 승인 2020.02.10 14:33
  • 호수 68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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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리 2

 "어째 자네 혼자만 오나? 조 포교는 어디 가고?"

 날이 밝아 관아로 들어간 박태수는 바로 현령의 호출부터 받았다. 차덕구 영감 일의 뒤처리가 어땠는지 궁금할 법도 했다.

 "맴이 편치 않은 갑데예. 한 며칠 집에서 쉬것다 했는디, 불러올까예?"
 현령이 잠시 박태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니야. 그 놈도 속 좀 썩었겠지. 장인 될 사람을 죽이고, 그 집안이랑 원수가 되었으니, 수습할 때까진 몸조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외려 방해만 될 테고. 자네가 알아 잘 수습허게."

 현령 방을 나온 박태수는 문서 처리를 서둘렀다. 언제까지 이 일로 동티가 가려질지 모를 일이지만, 입단속만 잘 하면 한동안 섬 밖으로 소식이 나가진 않을 터였다. 어두운 방에서 나오니 햇살이 눈부셨다. 날은 다시 화창해졌다. 겨울 날씨란 게 종잡을 수 없지만, 물때가 좋으니 당분간 바다에 파랑은 일지 않을 것이었다.

 마당을 지나가는데 마침 차상두가 넋 놓고 지나갔다. 박태수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가까이 가 어깨를 툭 쳤다. 차상두가 화들짝 놀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언성을 낮춰 차상두를 다독거렸다.

 "정신을 어디 놓고 다녀야. 남해를 뜨기 전까진 평소처럼 행동해야혀. 자네 아비는 병사로 처리됐응께 어여 집에 가 장례를 치러여. 함께 남핼 떠날 수 없싱께 양지바른 곳에 묻고."

 그제야 차상두가 두 눈을 훔치면서 울먹이며 말했다.

 "어매도 돌아가셨어요."
 "그기 무신 소리여?"
 "아부지 시신을 보고는 그대로 혼절하셨던가 봐요. 어제 해가 다 뜨기도 전에 눈을 감으셨답니다. 불쌍한 우리 어매."

 기가 막힌 소식이었다. 조옹집은 두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셈이었다. 조옹집의 시체라도 걷어차 주지 못한 게 갑자기 한스러웠다.

 호흡을 가다듬은 박태수가 차상두를 끌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공금으로 둔 엽전꿰미를 꺼내 주었다.

 "이걸로 두 분 고이 보내드려여. 금붙이는 잘 숨겨뒀제?"

 차상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방을 짚는 사람처럼 휘청거리면서 차상두는 동문을 향해 갔다. 박태수도 관아를 나서 집으로 갔다. 옥진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고 있었다. 오늘 새벽에 치른 뜨거운 정사의 여파가 얼굴을 달궈놓고 있었다.

 "거래가 잘 성사될 것 같소. 눈독들이던 기방 행수기생이 패물을 한보따리 들고 와 오늘이라도 당장 문서에 도장을 찍자 난리요. 금도 제 값을 쳐주겠다니, 일이 수월하게 풀리려나 보오."

 그나마 희소식이었다. 옥진의 손을 잡은 박태수가 홍이 엄마 소식을 전했다. 옥진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파리해졌다.

 "저런, 저런! 우야노. 홍이 어마이가 눈을 못 감았것소. 천 리 낯선 땅에 와 숨 한 번 크게 못 쉬다 그러코롬 가버리셨네. 천애고아가 되었시니, 홍이가 가여워 어쩌누."

 말도 못 마치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오데 문상 올 사람이나 있실 것이며, 초상 치를 경황이나 있것는가? 음식 잘 차려 사람을 보내시게."

 옥진이 조금 염려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죄인이 죽었는디, 그리 대놓고 바라지혀도 되것소?"
 박태수의 눈초리에 힘이 돋았다.

 "내가 다 책임질 테이 걱정 붙들어 매소. 줄초상이 났는데 시비로 걸믄 그기 사람이가!"

 허겁지겁 찬방(饌房)으로 들어가는 옥진을 마중하고 박태수는 다시 집을 나섰다. 이제부터 시각을 다퉈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오실에 사는 구자효 상쇠 어른을 찾았다. 그나마 속을 털어놓고 말을 나눌 이는 상쇠 어른밖에 없었다. 문 밖에서 말이 울어대는 소리를 들은 상쇠 어른이 방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상쇠 어른, 박태수라예."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상쇠 어른이 박태수를 맞았다.

 "앉게나. 애진 저녁에 어인 행차신감?"
 "몸은 좀 괜찮십니꺼?"

 상쇠 어른이 어깨를 토닥이면서 대꾸했다.

 "열명길이 코앞인 사램이 온전하믄 이상하제. 매구겨룸 전까지야 별 일 있것는감."
 그러고 보니 임신년이 바투 다가오고 있었다.
 "집들이 매구대결은 언지 허기로 했는가예?"
 "여즉 딱히 정해진 날짜야 없지만서도, 전라도에서 풍물패도 넘어 왔다니께 정허기 나름이제."

 남해에서 평생을 산 상쇠 어른은 인맥이 넓었다. 인덕과 인심까지 갖춰 어른을 믿고 따르는 이가 많았다. 배를 한 척 마련해야 한다면 상쇠 어른만큼 안심하고 주선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떠난 뒤 일어날 후환이 두려웠다.

 주변을 다시 살핀 박태수가 저간의 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입맛을 쩍쩍 다시며 듣던 상쇠 어른이 곰방대를 뽑아 입에 물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고, 결심이 선 듯 상쇠 어른이 입을 뗐다.

 "그라몬 내가 우찌 도와야 하것노?"
 "그라도 괜찮을까예?"
 "내야 살만큼 살지 않었나? 자네나 상두나 앞길이 구만 리 겉은 사람이제. 내 마지막 적선하는 셈치고 돕것네. 옥진이도 맴 고상이 많았것어."

 박태수가 침을 꿀꺽 삼킨 뒤 말했다.

 "배가 한 척 필요해예. 한 한 달 어름 물길을 헤치고 갈 만한 배라예."
 "자네 부부서껀 상두하고 홍이가 탈 요량인감?"
 "야."
 "자네 배를 부릴 줄은 아는감? 난바다로 나가야 하는디?"
 "지가 이래 벼도 갈고지 출신이라예. 배라믄 알 만큼은 알지예."

 "그렇긴 하구먼. 내 배는 수배해봄세. 섣달 보름날에 매구 경연을 열도록 약조해 놓겠네. 관음포 수군들하며 만호(萬戶)까정 다 불러 크게 놀음을 할 팅께 그때 자네하고 상두는 슬쩍 빠져나가 배를 타시게나. 술을 잔뜩 멕일 팅께 경비는 허술할 거여."

 "비용은 지가 다 드리것십니더."
 상쇠 어른이 그윽이 박태수를 바라보더니 곰방대를 재떨이에 탁탁 치며 말했다.

 "됐네. 인자 가믄 영영 이별인디, 내가 주는 이별 선물로 생각허게."
 "알것십니더."
 밖으로 나온 박태수는 상쇠 어른의 집 토담을 파고 금붙이 한 움큼을 묻어두었다.

 차상두와 차홍이의 부모 차덕구와 윤점이는 선소 포구와 강진만이 한 눈에 들어오는 언덕에 하릴없이 묻혔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지은 왜성(倭城)의 천수각(天守閣) 터가 있는 곳 북녘이었다. 구름이 가리고 산이 가리지만 아득히 올라가면 고향이 있을 법한 곳이었다. 정자집에서도 아주 멀지는 않았다. 번듯한 봉분을 여럿 올릴 수는 없어 두 부부를 합장했다.

 권문탁은 초라한 매장의 장소를 찾았다. 많은 사람이 함께 하지는 못했다. 차덕구와 함께 일했던 사람 몇과 윤점이와 바래를 하며 친해진 동네 아낙 몇이 시신이 땅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잔정이 많은 유순심이 말없이 눈물을 뚝뚝 흘렸고, 방자는 뒷전을 맴돌며 애꿎은 땅만 걷어찼다.

 상두꾼들의 상여소리도 없었다. 지붕에 올라 부르짖는 초혼(招魂)도 없었다. 그렇게 두 이름 없는 민초(民草)의 결별은 쓸쓸했고 고통스러웠다. 낡은 상복을 입은 차상두는 관이 광(壙)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입을 꾹 다물고 지켜보았다. 홍이는 몸을 가누지 못한 채 하염없이 아빠와 엄마를 부르며 울부짖었다. 옥진이 옆에서 눈물을 훔치며 홍이를 달랬다.

 권문탁은 홍이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당장 달려가 흐느끼는 어깨를 감싸 안으며 위로하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런 눈을 의식해야 하는 자신이 너무나 미웠다. 지금도 몇몇 사람들은 권문탁을 보며 쑤군거렸다.

 신분의 차별이 없고 권력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없는 세상. 권문탁은 하늘을 보며 어디쯤에 그런 세상이 있을지 가늠해 보았다. 구름에 가려진 하늘 어디에도 그런 세상은 보이지 않았다.

 성글고 낮은 봉분이 모습을 드러낼 즈음 바람에 나부끼는 나무 그늘 아래 몇몇 사람이 앉아 결별의 시간을 가졌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아무도 옷깃을 여미지 않았다. 홍이는 여전히 부모의 봉분을 어루만지며 떠나지 못했다. 그저 조금이라도 부모와 가깝게 있고 싶어 하는 목마름은 그렇게밖에 드러낼 수 없었다.

 나무에 기대 탁배기 잔을 자작하는 권문탁 옆에 누군가 앉았다. 반쯤 술에 취한 권문탁은 흐린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박태수였다.

 "도령님도 오셨십니꺼?"
 "아, 오셨는가? 옥진이도 오고 자네도 왔으니, 고인이 외롭진 않겠네."

 권문탁은 왠지 박태수 앞에서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저 두 사람의 죽음에는 자신도 책임이 있었다. 그들을 죽음에서 건지지 못한 죄는 영원히 씻지 못할 것이었다.

 "죽은 이들이야 지신(地神)께서 거둘 것이지만, 산 사람은 또 살아가야지예."

 뭔가 뼈 있는 말처럼 들렸지만, 그 속을 헤아릴 만한 여유가 권문탁에게는 없었다. 술잔을 비운 권문탁이 박태수에게 술을 권했다. 박태수가 허리를 숙이며 술잔을 받았다. 그것이 또 민망했다.

 "내가 자네보다 한참 어린 연배일 텐데, 이리 공경을 받으니 남우세스럽네."

 "언젠가 서로가 서로를 공경하는 시상이 오것지라예."

 박태수의 술잔을 받으며 권문탁이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네그려."

 그때 누가 시작했는지도 모를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버리고 가시리잇고
 날러는 어찌 살라하고
 버리고 가시리잇고
 잡사와 두어리마난
 선하면 아니올셰라
 셜온님 보내옵나니
 가시난 듯 도셔오쇼셔.
 -고려가요 <가시리>에서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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