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유시(詠柚詩) 20수를 읊을 때 `동창이 밝았느냐`도 같이 있지 않았을까
상태바
영유시(詠柚詩) 20수를 읊을 때 `동창이 밝았느냐`도 같이 있지 않았을까
  • 남해타임즈
  • 승인 2020.02.20 15:12
  • 호수 68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의 고향, 나의 삶 27
碧松 감 충 효 시인 / 칼럼니스트
碧松 감 충 효
시인 / 칼럼니스트

 영유시이십수(詠柚時二十首)는 남구만이 거제에서 남해로 이배된 뒤에 우리 고장 특산물 유자나무에 얽힌 고사와 농민의 애환을 읊은 시여서 더욱 심오하다. 보물섬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이때 유자에 얽힌 고사와 풍광, 농민의 애환을 심층 분석한 결과 유명한 국민시조 한 편이 남해에서 창작되었다는 연구 결과에 주목해야 한다. 룗약천집(藥泉集)룘 권1의 번방곡 11수는 당시 유행하던 한글 시조(時調)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인데, 정몽주의 룗단심가(丹心歌)룘, 이항복의 룗철령가(鐵嶺歌)룘 및 효종의 시조와 남구만 자신이 지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시조가 한역되어 있다. 이 외에 이중집(李仲集)의  "뉘라서 날 늙다 하는고…"와 서경덕(徐敬德)의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등도 있는데, 시조의 한역(漢譯)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살펴볼 수 있어 흥미롭다. 

 권2는 1679년~1711년까지 지은 시로 후반부에는 이민서, 이상진, 오도일, 서문중 등에 대한 만시(輓詩) 25편이 실려 있다. 요새는 교과서가 개편되어 약천 남구만의 시조가 나오는지는 모르지만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약천의 시조뿐만 아니라 정철, 양사언, 길재 등의 옛시조와 김상옥, 이호우 등 현대시조 6편을 달달 외우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면서 옛 선인들의 충절과 선비정신, 경로효친을 배웠었고 현대시조에서는 현대 정서에 맞는 시심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중·고등학교에 올라갔어도 시조는 국어 교과서에 꼭 실렸었고 필자도 그 정형성, 내밀성 또는 간결성, 응축력에 매료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남구만의 유명한 시조는 창작 연대의 기록이 없다. 

 경기도 용인의 향토사학자들은 이 시조를 용인에서 지었다고 주장하는데 약천이 관직에 물러나 노후를 보낸 곳이며 사래 긴 밭을 뜻하는 장전(長田)이라는 지명이 있다고 하고, 또 홍성에서도 약천이 머문 적이 있다해 그곳에서도 약천초당을 지어놓았으며 시조비를 세우는 등 시조 하나를 놓고 향토사학자와 지자체가 뭉쳐서 쟁탈전을 벌이는 양상이다.

 약천은 남해에서도 9개월여 유배생활을 하며 그 당시 우리 고향의 특산물 유자를 노래한 영유시(詠柚詩) 20수를 비롯하여 등망운산(登望雲山), 등금산(登錦山) 등 주옥같은 시문(詩文)을 남겼는데 2012년 전후해서 그 당시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이며 한국유배문학연구소 소장이었던 박성재 씨는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의 시조에 대해 다양한 각도로 영유시(詠柚詩)와 비교분석하고 두 시와 시조의 관련성을 입증하고 서포 김만중과 주고 받은 서찰과 시문을 검토하여 남해 창작설을 주장함과 동시에 `시조`의 성립과 창작 배경을 분석하여 그때 그때 우리 고향의 지방신문에 발표하였고 마침 그 무렵 재경남해군향우회지 룗남해가 그리운 사람들룘2012년 판을 발간할 즈음이라 이 책의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던 필자는 박성재 씨에게 원고 청탁하여 약천 남구만의 `시조 성립과 창작 배경`의 글을 편집위원회를 통과하여 게재하였다. 그의 연구물 상당한 양의 내용은 언급한 책자 528~531쪽에 실려 있으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박성재 소장은 "결국, 이 `시조`는 유자농사를 짓는 남해 농민들이 과도한 조세부과로 인해 핍박받고 있는 현지사정을 직시하고 목민관과 농민들에게 내린 엄정한 훈계라고 할 수 있고 남해가 가지는 지정학적 지명의 심상에서 창작되어진 권농가(勸農歌)·독농가(篤農歌)가 바로 영유시(詠柚詩)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