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세기, 남해 봉황동 유적의 제사장은 누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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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세기, 남해 봉황동 유적의 제사장은 누구였을까?
  • 남해타임즈
  • 승인 2020.03.16 14:03
  • 호수 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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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군 기록이야기 17 │여창현 남해군 학예연구사
여 창 현남해군 학예연구사
여 창 현
남해군 학예연구사

 지난 2015년 6월 남해 봉황산 나래숲 조성을 위한 문화재 발굴조사 결과, 기원전 4세기 무렵 삼한시대 환호가 조성된 봉황산의 정상부에서 남해지역의 상징적인 의례 장소로 볼 수 있는 주거지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삼한시대는 기원전 3세기경, 중국으로부터 철기가 도입되고, 토광묘가 채용되는 시점을 시작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룗후한서(後漢書)룘 `동이전(東夷傳)-한조(韓條)`에 사람들 가운데 문신을 한 자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왜의 수인과 같이 문신을 함으로써 대어와 수금으로부터 몸을 보호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그 당시 남해안에는 어로활동과 해양 활동이 활발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남해군에서도 삼한시대 후반부에 해당되는 유적이 일부 확인되는데, 대표적인 유적인 도마리 패총이 1960년대 발견·보고됐다. 출토된 유물로 보아 그 시기는 2~4세기대로 추정되고 있다. 그 외 남해읍 남쪽의 구릉 능선에 입지한 남해 남산유적이 있으며, 남산유적은 삼한시대 말기의 주거지 2동이 조사됐다.

 환호 유적이 입지한 봉황산은 저산성 구릉지 중앙에 자리 잡은 독립 구릉(169m)으로, 정상부에서는 남해읍 전체와 동쪽 해안까지 조망이 가능하다. 유적의 북, 서, 남서쪽에는 봉천과 동산천을 중심으로 경작지가 조성돼 있어, 과거에도 가경지와 용수 확보에 유리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봉황산 정상부 일대에서는 초기 철기시대의 환호 2기, 주거지 4동 등 18기의 유구(遺構)가 조사됐다. 봉황산 환호 유적은 최소 2열, 최대 7열의 도랑이 둘러진 다중 환호(多重 環濠)이다. 

 봉황산 환호 유적은 도서지방에서 최초로 확인된 환호 유적이며, 환호 내부에는 중앙의 평탄지를 중심으로 4동의 주거지가 2동씩 남북 대칭으로 배치돼 있다. 청동기시대에서 초기 철기시대에 걸쳐 조성된 환호 유적 중 상당수는 환호 내부에 불과 몇 동의 주거지만 조성돼 있고, 대부분의 주거지는 환호 외부에 밀집 조성되거나 환호가 취락에서 독립된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환호의 기능은 방어·경계·배수·의례 등의 복합적인 것으로 보는 의견과 의례가 주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는 의견을 비롯해 상징적인 시설물의 구획, 특정 장소의 경관을 강조하는 방식 등의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어 왔다. 봉황산 환호 유적에서는 재굴착의 흔적, 고의로 투기한 유물, 의식적인 소각 행위, 공헌된 유물군, 매납갱 등 다양한 의례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환호 내부에 조성된 4동의 주거지는 남아 있는 상태가 매우 불량하여 구조적인 고찰이 어려우나, 안성 반제리 유적 등 같은 시기의 유적과 비교해 볼 때 제장(祭場)이나 신관(神官)의 주거, 제사의 준비와 관련된 시설 등으로 추정된다. 유적이 형성된 시기는 원형점토대토기((圓形粘土帶土器), 두형토기(豆形土器), 조합식우각형파수(組合式牛角形把手), 석도, 석창 등의 유물조합으로 볼 때 기원전 4~3세기경에 해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환호 유적이 입지한 봉황산 정상부에서는 읍 전체와 동쪽 해안까지 조망이 가능하며, 역으로 평지에서 산정을 바라볼 때는 사방의 평지 어디에서나 산정이 우러러 보이는 경관을 이루고 있어 기존에 알려진 대다수 구릉형 환호 유적들이 입지한 경관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봉황산 환호 유적은 주변 일대 경관의 중심인 봉황산 정상부가 지역 집단의 권력의 상징이자 의례의 대상이 되고, 환호는 권력의 상징이자 제장인 산정부의 상징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형성된 문화 경관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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