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전(花田)에 깃든 김 구(金絿) 선생의 혼(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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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花田)에 깃든 김 구(金絿) 선생의 혼(魂)
  • 남해타임즈
  • 승인 2020.04.23 16:59
  • 호수 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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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 나의 삶 36 │ 碧松 감충효
碧松 감 충 효 시인 / 칼럼니스트
碧松 감 충 효
시인 / 칼럼니스트

 자암(自庵) 김 구(金絿)(1488~1534)는 조선 중종 때의 명신이자 서예가로 조광조 등과 함께 도학 정치를 통한 개혁에 앞장서면서 1519년(중종 14) 32세의 나이에 홍문관 부제학에 올랐다. 그러나 그해 남 곤, 심 정 등의 훈구파 세력이 일으킨 기묘사화로 인해 개혁파 조광조와 연루된 김 구는 개령(開寧:경북 김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수개월 후 죄목이 추가되어 적소 남해 노량으로 이배되어 오게 된다. 

 그의 저서 룗자암집룘에는 남해찬가로 일컬어지는 경기체가 화전별곡과 함께 남해 유배 생활의 시름을 잊고자 지은 60여 수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룗화전별곡(花田別曲)룘에서의 화전(花田)은 풍광이 아름다웠던 남해의 별칭이다. 

 자암 김 구는 글씨에 뛰어나 안평대군 이 용, 봉래 양사언, 석봉 한 호와 더불어 조선 전기와 중기의 4대 명필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또한 서예는 왕희지체를 배워 독자적인 필법을 개창하였는데, 자암이 한양 인수동에 살았기에 자암의 글씨체를 일컬어 인수체라 부르게 되었다. 자암은 13년간의 긴 남해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고향 예산으로 돌아갔다. 유배 생활 중 부모상을 당했으므로,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식으로서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유배를 마친 후 제일 먼저 부모의 산소에 가서 시묘하면서 통곡하니, 눈물방울이 떨어진 곳마다 초목이 말라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얼마 후 자암은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당대의 거목 거유로 우리 고장 남해에서 국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경기체가 룗화전별곡룘을 남기신 선생을 생각하며 필자의 제2시집에 남겼던 시조 한 수로 그 분의 넋을 기려본다. 

 당대의 거목 김 구 선생이 우리 고향에 기거하며 남긴 룗화전별곡(花田別曲)룘은 우리 남해인이 영원히 기억하고 간직해야 할 보물섬의 자산이다. 백척간두의 험난한 상황에서 유배지에서 써내려간 글들은 혈서보다 뜨겁고 그 어떤 서사시보다 웅대무비하니 우리는 그들이 남긴 글에서 크나큰 위안을 얻고 더 희망적인 미래를 열어가야 할 책무를 절감한다. 그들의 유현(幽顯)이 끌고 가는 푸른 레이저광선이 사악한 세상의 어느 곳을 타격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혜안이 반드시 필요할 때다. 
 
 정암과 도학 정치 개혁의 선봉에서
 홍문관 부제학의 그 뜻 세워 펼칠 적에
 기묘년 훈구 세력이 그를 몰아 내치더라.
 
 십삼 년 질곡에서 불씨 살린 화전별곡
 하늘 끝 땅 끝, 한 점의 신선섬을
 여섯 장 경기체가로 이리 밝혀 올리신 님.
 
 귀양 풀려 고향 예산 돌아온 자유의 몸
 부모상 못 본 비통 피를 토해 울었거니
 귀촉도 화전 못 잊어 오늘 밤도 우는가. 
 
 - 필자의 제2시조집 룗남녘 바람 불거든룘(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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