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봉매(南島鳳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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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봉매(南島鳳梅)1
  • 남해타임즈
  • 승인 2020.05.28 16:21
  • 호수 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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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 나의 삶 41 │ 碧松 감충효
碧松 감 충 효 시인 / 칼럼니스트
碧松 감 충 효
시인 / 칼럼니스트

 서포 김만중 선생의 적소 노도(櫓島)에서 옮겨와 소재 이이명 선생의 적소인 봉천 습감재 주변 동뫼에 심는다는 의미로 `남도봉매(南島鳳梅)`라고 명명하셨다고 했다. 필자는 봉천을 타고 내려가 동뫼산에서 그 남도봉매를 확인할 수 있었다.

 소재(疎齋) 이이명(1658~1722) 선생은 조선 후기의 왕족 출신으로 노론 4대신의 한사람이다. 조선 제4대 임금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서5남인 밀성군(密城君)의 후손으로 광원군 이구수의 5대손이자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의 손자이다. 소재 선생은 장인인 서포 김만중 선생이 노도 적소에서 생을 마감한 그해 남해로 유배되어 와서 매부(梅賦)를 남겼다.     

 읍성의 죽산리(대뫼) 일대에 소재 선생의 적소였던 습감재(習坎齋)와 그의 영정을 모셔 제사했던 봉천사(鳳川祠)라는 사당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현재 남해유배문학관에 자리한 봉천사 묘정비의 기록으로 남아 있거니와 죽산리 현지에 대를 이은 구전과 후대의 기록으로 여러 경로를 통해 자리 잡았다. 봉천사 묘정비문에 의하면 봉천사는 죽산마을 봉천 상류에 그 위치를 적고 있다. 

 남해의 진산 망운산에서 발원하여 죽산 앞의 하마정 들을 적시고 강진바다로 흘러가는 큰 하천이 봉천이다. 남해유배문학관도 봉천변에 자리 잡았다. 읍내 문화의 거리에도 선생의 초상화와 함께 매부인양 새겨져 있으나 실은 매부의 본문이 아니라 매부를 짓게 된 연유문이어서 하루 빨리 수정해야 되리라 본다. 

 어느 해 이른 봄날에 고향 마을을 방문하여 매원을 거닐어 보려고 울창한 죽림을 뚫고 당산으로 올랐다가 크나큰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 우람하던 매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곳엔 대학의 부속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그 매원(梅園)은 소재 선생의 습감재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곳이고 서포 김만중 선생의 적소에서 옮겨온 매화나무 두 그루를 살려 키우면서 매부(梅賦)를 탄생시킨 곳이다. 

 이 지방 사람들에게 충신효제(忠信孝悌)를 가르쳤던 인연으로 소재 선생과 서포선생의 혼백이 깃든 매화나무 두 그루는 지방 백성들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이어져 오다가 이 역사적 사실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남해중학교와 남해제일고등학교의 전신인 남해공립농업실수학교 개교 때부터 대대적으로 매원을 조성한 것으로 본다.    

 그 당시 남해 어느 곳에도 이러한 규모의 매원을 볼 수 없었기에 매향이 진동할 때는 학생들은 물론 지방민들의 감탄을 자아냈던 곳이었다. 소재 선생과 서포 선생의 사연이 깃든 매부와 두 그루의 매화나무가 있었던 습감재를 연결시켜 문화재화 못한 탓에 그 우람하던 매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느 날 죽산 동네의 박 노인께서 봉천의 파천들에 나왔다가 매원이 불도저에 밀려 나가는 것을 보고 한걸음에 달려가 저절로 익어 떨어진 흙속에 묻혀있는 매실 몇 알을 취하여 당산 줄기 아래편 동뫼에 심었다는 이야기를 친척에게 듣고는 박 노인을 직접 만나 뵈었다. 오래 전의 동네 역사를 꿰뚫어 보시며 습감재와 봉천사에 대한 구전자료는 물론 봉천사 묘정비문의 역사적 기록을 필사하신 묵서를 가지고 계셨다. 

 서포 김만중 선생의 적소 노도(櫓島)에서 옮겨와 소재 이이명 선생의 적소인 봉천 습감재 주변 동뫼에 심는다는 의미로 `남도봉매(南島鳳梅)`라고 명명하셨다고 했다. 

 필자는 봉천을 타고 내려가 동뫼산에서 그 남도봉매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몇 년 뒤 화전문화제 때 남해문학회에서 개최한 거리 시화전에 서울에서 `남도봉매(南島鳳梅)`란 시를 지어 남해읍 문화 거리에 전시하였는데 다음 주에 더 자세한 사연과 그 때 내걸었던 시화를 사진으로 실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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