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봉매(南島鳳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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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봉매(南島鳳梅) 2
  • 남해타임즈
  • 승인 2020.06.04 11:19
  • 호수 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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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 나의 삶 42
碧松 감 충 효 시인 / 칼럼니스트
碧松 감 충 효
시인 / 칼럼니스트

전회에 이어 남도봉매(南島鳳梅) 2를 올린다. 유서깊은 당산의 우람찬 매원은 그야말로 이 지방 사람들의 보물이었다.

특히 죽산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 고장의 배움의 전당인 남해중학교와 남해농업고등학교가 본동에 소재함을 자랑으로 여겼고 동네의 울창한 죽림과 연결된 당산의 매원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다. 지금의 남해중학교와 남해제일고등학교의 전신인 남해공립농업실수학교가 1930년도에 개교할 무렵 전 동민이 동원되어 동네에 있던 직육면체 모양의 큰 바위를 궁글대와 밧줄로 학교 운동장까지 옮겨 훈화대로 기증할 때의 모습은 흑백 사진과 함께 학교 개교 실록 자료에 남아있다.

그 후 남해중학교와 남해농업고등학교가 경남도립남해대학의 부지로 변경될 때 그 훈화대는 지금의 남해제일고등학교 기록관 옆으로 옮겨 전시돼 그 상징성을 이어가고 있다.

소재 이이명 선생과 서포 김만중 선생의 애틋한 사연과 감응으로 창작된 매부(梅賦)는 죽산 당산의 습감재(習坎齋)를 배경으로 한다.

소재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100년간이나 제사했던 봉천사(鳳川祠)와 봉천사 묘정비(鳳川祠 廟庭碑)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 온 인연 때문에 남도봉매(南島鳳梅) 역시 죽산인의 박노인에 의해 어어졌다.

박노인은 개발의 불도저에 밀려 그 우람하던 매원이 사라지는 현장을 목격하고 누구보다도 소재 이이명 선생과 서포 김만중 선생의 생애와 동네의 구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진 학자였기에 매원의 현장에서 매실 몇 알을 살려 남도봉매(南島鳳梅)로 이어가게 했다.

필자는 어느 이른 봄날 매원의 추억을 잊지 못해 동네의 울창한 죽림을 뚫고 당산에 올랐다가 매원이 사라진 것을 보고 그 연유를 수소문 한 결과 동네 박노인의 남도봉매 살리기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 사연을 담은 시 한 편을 지어 2011년 10월 27일에서 29일까지 거행된 제23회 남해군민의 날 및 화전 문화제 행사 때 거리 시화전에 출품하였다.

그때 남해문학회는 강철도 회장님이 이끌어 가실 때였고 회원들의 시화는 유림동 고개에서 2m 정도의 간격으로 효자문까지 전시되어 거의 1km에 이를 정도로 대성황을 이뤘다.

오래전에 남해대학에 오랫동안 몸담아 계신 교수님을 향토사학자 한 분과 같이 만나 매원과 습감재, 매부, 봉천사묘정비에 관한 대화를 나눈 바 있었는데 대학에서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아쉬워 하셨다.

남해대학은 습감재의 옛터에 세워진 부속건물의 현판에 대한 재고와 주변에 매화 고목나무 몇 그루라도 재현해보고 당대의 거목이 서당을 열어 백성을 가르친 습감재 옛터에 배움의 터를 다시 세운 의미를 새겨봤으면 하고 권해 드린다.

습감재의 폐허를 살려 구한말 남해공립농업실수학교가 세웠던 서당풍의 3칸 목재 기와집은 필자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교원사택으로 사용되었었는데 바로 그 자리에 또 현판을 단 건물이 들어섬은 우연이 아닌 매부의 혼백이 인도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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