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 앞에서
상태바
비문 앞에서
  • 남해타임즈
  • 승인 2020.06.12 15:38
  • 호수 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의 고향, 나의 삶 43 │ 碧松 감충효
碧松 감  충  효시인 │ 칼럼니스트
碧松 감 충 효
시인 │ 칼럼니스트

군 문화재 3호로 지정돼 있던 봉천사 묘정비는 2011년 12월 27일 자로 남해유배문학관으로 옮겨지기 전에는 관리가 잘되지 않고 있었다. 넝쿨이 비석을 감았고 찔레나무가 번져 접근을 어렵게 했으며 개망초 같은 잡초가 우거져 황량하기 그지없었고 주변의 대나무가 가려져 어수선했으며 진입로도 제대로 없고 그나마 급경사여서 오르내리기가 매우 어려웠다.
비석의 하단부는 이미 마모가 크게 진행되었고 비석 중간의 어떤 글자는 파손되어 해독이 잘 안 되기도 하였다. 그 당시 필자는 신문, 문예지, 인터넷 공간, 필자의 제2시집, 인터넷 신문 등에 기회 있을 때마다 봉천사를 복원하고 봉천사 묘정비도 옮겨서 비각도 만들고 과학적인 처리를 해서 비문의 마모를 막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던 중 인터넷 신문 <남해안시대>의 창간에 즈음해 2011년 1월 20일 자로 봉천사묘정비에 대한 마무리된 마지막 글을 올렸다. 주요 골자는 역시 사우(祠宇)의 전형을 차용해 봉천사를 복원하고 그 묘정에 봉천사묘정비를 자리매김 해주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소재(疎齊) 이이명 선생의 유허 유적 유물에 관해서는 <봉천사-봉천사묘정비-습감재-매부-서포 김만중 선생과의 매부(梅賦)에 얽힌 매화 두 그루>가 한 콘텐츠에 담겨야 한다. 그 시대 인근 진양군의 선비와 남해의 선비를 위시한 이 지방 백성들이 무엇 때문에 봉천사를 짓고 봉천사 묘정비를 세우고 영정을 모시고 제사했는가에 대한 인본주의적 역사성을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일이다.
봉천사 복원 사업과 봉천사와 가까이 있었던 소재 선생의 적소 겸 서당이었던 습감재(習坎齋)를 재현한 서당체험, 서포 김만중 선생과의 애틋한 사연과 그 당시 정치적 상황에 의연하게 대처한 양대 거목의 사상이 깃든 매부(梅賦)의 시비도 지금 소규모로 일부분만 돼있는 것이 아닌 전문을 새긴 시비로 교체하고 서포 선생의 적소에서 옮겨와 심은 매화 고목 두 그루도 지금의 것이 아닌 좀 큰 고목으로 재현하면서 주변에 단아한 매원을 조성해 나지막한 기왓장 담으로 오붓한 공간을 만들어 준다면 봉천사와 봉천사 묘정비, 습감재가 살아 숨 쉬는 역사적 공간이 우리를 부를 것이며 서포와 소재의 영적인 만남인 매부의 도타운 향기가 유배문학관 전체에 감돌 것이고 이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봉천사 묘정비가 진정 제자리를 찾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09년도 쯤 봉천사 묘정비(사진) 앞에서 지은 시조를 옮겨본다.

습감재 님의 뜻을 받들어 모셔옴은 / 연대는 흘러가도 빛과 소금 그대로라 / 혼미한 안질의 세상 씻어 볼까 합니다. // 뱁새의 소란함에 대봉 노래 못 들으니 / 주청(奏請)의 님의 음성 낭랑한 바람소리 / 봉천사 옛터에 들어 닫힌 귀를 엽니다. // 버려질 몹쓸 것들 냄새는 더 역겨워 / 흘러간 매향 찾아 당산에 올라보니 / 매부에 서포 소재의 매향 피어오릅니다.
- 필자의 제2시조집 「남녘 바람 불거든」(2010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