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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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 남해타임즈
  • 승인 2020.06.26 16:34
  • 호수 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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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 나의 삶 45 │ 碧松 감충효
碧松  감  충  효시인 / 칼럼니스트
碧松 감 충 효시인 / 칼럼니스트

몇 년 전 9월 중순께 경기도 양주시의 목화축제에 갔다가 인근의 나리 공원을 산책한 일이 있었다. 강렬한 햇빛이 쏟아지는 잔디밭에 선명하고 화려하게 핀 무궁화를 보면서 아련한 어릴 적 고향의 추억을 더듬어 본다.
필자의 집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필자에게 당숙모님 되시는 분과 6촌 형제자매가 살고 있었는데 동남향으로 앉은 4칸 기와집을 빙 둘러 무궁화 울타리가 조성되어 있었다. 키대로 자라면서 피워내는 무궁화는 정말 화려했다. 초여름부터 피기 시작해 10월이 다 가도록 날마다 피고 지기를 이어가는데 이렇게 끈질기게 피는 다른 꽃은 별로 없다.
옛 기록을 보면 우리 민족은 무궁화를 고조선 이전부터 하늘나라의 꽃으로 귀하게 여겼고, 신라는 스스로를 `근화향(槿花鄕)/무궁화 나라`라고 부르기도 했다. 중국에서도 우리나라를 `오래 전부터 무궁화가 피고 지는 군자의 나라`라고 칭송했다. 애국가 가사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들어있음도 무궁화에 대한 역사성을 잘 말해준다.

무궁화 나무.
무궁화 나무.

필자는 목화축제가 열리고 있는 나리 공원에 화려하게 핀 무궁화를 보면서 카메라에 담았는데 집에 와서 열어보니 색상이 선명하고 자태가 너무나 당당하고 의연한지라 한동안 컴퓨터 모니터의 바탕화면에 깔아두고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기도 했다.
무궁화 나무는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라는 양수(陽樹)다. 명색이 국화(國花)인데 어떤 곳에서는 일본의 국화인 벚꽃 나무아래에 심어놓은 걸 보면 기가 찬다. 독립운동가들이 구국정신의 상징으로 무궁화를 내세우자 일제는 보이는 대로 이 무궁화를 뽑아서 제거하는 데 혈안이 되었었다. 
그때는 그렇다 치고 근래에도 관공서나 공원 또는 둘레길에 무궁화동산이라고 만들어 놓고 2미터에서 4미터까지 자라는 무궁화나무를 무슨 분재 키우듯 가지를 잘라버리니 양수인 이 나무가 주변의 키 큰 나무에 햇빛을 빼앗겨 잘 자라지도 못하고 고사하는 경우도 많이 본다. 물론 다른 키 큰 나무가 없을 때는 수형조절을 위해 이른 봄 싹이 트기 전에 가지를 전정하면 꽃눈을 가진 새싹이 많이 나와 수형 조절도 되고 꽃도 더 많이 피게 된다.
독립운동가이며 언론인, 교육가인 남궁억 선생이 `사쿠라(벚꽃)는 금방 시들지만 무궁화는 면면히 계속 피는 꽃`이라며 일본의 벚꽃과 무궁화를 비교한 것을 문제 삼아 일제는 홍천의 보리울 학교에 키운 무궁화 묘목 8만 그루를 전량 소각했고 학교도 폐쇄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이와 같은 만행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운 오산학교에서도 자행되었다.
필자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앞의 공원에 무궁화동산이 있는데 등나무 넝쿨이 무궁화 대여섯 그루를 한 묶음으로 조이는 바람에 제대로 자라지도 못하고 죽어가고 있는지라 시청에 몇 번 건의했으나 늦어지기에 어느 날 무궁화 나무를 칭칭 감고 있는 등나무 모두를 잘라버렸더니 수세를 회복한 무궁화 나무는 꽃이 활짝 피어나 공원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그런데 그 등나무의 뿌리는 너무 커서 캐어낼 수 없어 약품을 사용해 뿌리를 제거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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