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傳) 선원사지가 품은 청자 원숭이모양 연적
상태바
전(傳) 선원사지가 품은 청자 원숭이모양 연적
  • 남해타임즈
  • 승인 2020.09.24 12:18
  • 호수 7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군 기록이야기 28 │ 여창현 남해군학예연구사
국보 제270호 청자모자원숭이모양연적.
국보 제270호 청자모자원숭이모양연적.

 간송미술관에는 어미 원숭이가 쪼그리고 앉아 두 팔로 새끼를 받쳐 안고, 새끼는 왼팔을 뻗어 어미의 가슴을 밀고 오른손은 어미의 얼굴에 갖다 대고 있는 형상의 국보 제270호 청자모자원숭이모양 연적이 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자간의 애틋한 정을 느끼게 한다. 

 원숭이의 모정(母情)에 관한 이야기는 중국 남북조시대 유의경(劉義慶, 403~444)이 지은 책, 룗세설신어(世說新語)룘 단장(斷腸) 편에 전해진다. 이규보의 룗東國李相國集(동국이상국집)룘에는 "외로운 원숭이 휘파람 불고(孤猿嘯)", "석양빛은 원숭이가 울어 보내고(晩色猿啼送)"와 같이 슬프고 근심 가득한 정서를 드러낼 때 등장하기도 한다.

 동물모양 청자는 상서로운 동물을 모방한 것과 실제 동물을 본뜬 것으로 나눠진다. 이들은 집정자의 권위를 상징하거나 시대에 따라 종교·정치적 관점으로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실제 동물의 소재로는 원앙, 오리, 원숭이, 두꺼비 등이 있다. 예로부터 `동국무원(東國無猿)`이라는 말이 전해졌듯이 원숭이는 우리나라의 토종 동물이 아니다.

전 선원사지 출토 청자원숭이모양연적(뒷면)[사진 제공-경남연구원]
전 선원사지 출토 청자원숭이모양연적(뒷면)
[사진 제공-경남연구원]

 원숭이가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에 관한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조선 초기에 선물용으로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원숭이 도상은 통일신라시대 무덤의 호석(護石)과 탑 등에 등장하기 때문에, 늦어도 통일신라시대부터 `원숭이`에 대한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인들은 원숭이를 자주 볼 수는 없었겠지만 일부 지배층에서는 원숭이를 애완용으로 기른 경우가 있기 때문에 생소한 동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팔만대장경이 판각되었다고 알려진 남해의 전 선원사지에도 이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원숭이모양 연적이 발견되었다.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 선원사지의 중심연대는 12세기 중반에서 13세기로 추정되며, 해무리굽 완과 고려 후기의 청자들을 볼 때 11세기 후반 이전으로 건물의 연대는 올라갈 수 있으며 14세기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 선원사지에서는 고급청자에서 사용하는 흑백상감 기법이 사용되거나 수금문과 여의두문, 앵무문 등을 비롯한 고급 기종에만 시문되는 문양이 확인되고 있어 상류 계층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의 상형청자는 왕실을 중심으로 한 최상류 계층에서 의례용기와 문방구 등으로 제작 사용된 기물이다.

전 선원사지 출토 청자원숭이모양연적(측면)[사진 제공-경남연구원]
전 선원사지 출토 청자원숭이모양연적(측면)
[사진 제공-경남연구원]

 

 남해 전 선원사지에서 출토된 원숭이모양 청자는 일부만 잔존하여 형태나 용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출토지가 명확한 국내 유일한 원숭이모양 연적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