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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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의 독백
  • 남해타임즈
  • 승인 2020.09.24 12:27
  • 호수 7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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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 숙본지 칼럼니스트
이 현 숙
본지 칼럼니스트

 안녕, 나는 마늘이야. 사람들은 우리를 톡 쏘는 맛에 먹는다지?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알싸해진 데는 스트레스도 한몫했다고 봐. 자, 한해살이 목숨을 살아가는 속사정 좀 들어 볼 테야? 우리를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고.

 해마다 이맘때면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다 못해 흑마늘이 될 지경이야. 이번 마늘 파종기엔 농사를 접는 집이 또 얼마나 나올지 불안불안하다니까. 지금까진 그럭저럭 대를 이어왔지만 현재 남은 농가마저 하나둘 사라지다간 언젠가 씨가 마를 날이 오지 말란 법도 없잖아, 멀쩡한 마늘밭이 묵정밭 꼴 나는 건 시간문제라고. 옛날 옛적 태백산 신단수 아래 살던 곰이 마늘과 쑥을 먹고 웅녀가 되어 환웅과 혼인했잖아. 그때 그 마늘이 우리 시조님이셔. 행여 우리 족보가 식물도감에나 남게 된다면 무슨 낯으로 조상님을 뵙겠냐고!

 지난겨울은 체감상도 실제로도 평균기온이 예년보다 높았어. 시베리아 부근에서 형성되는 차가운 대륙성 고기압이 한반도 한파에 영향을 주는 건 다들 알지? 그런데 이 대륙성 고기압의 기온이 상승하면서 한반도까지 세력을 확장시키지 못한 거지. 노지에서 생활하는 우리야 날씨 덕 좀 봤지. 관측 사상 적설량도 가장 적었다더라고. 안 그래도 여긴 눈이 귀해서 눈 벼락 한 번 맞아 보는 게 소원인데, 어째 돈 벼락 맞는 것만큼이나 힘들구먼. 하여간 강원도에 사는 우리 `고랭지파` 종친들 말을 바람결에 듣자하니, 여기 겨울은 거기와 비교하면 아프리카더구먼. 이래봬도 기상학적 관심은 당신들 못지않다고. 

 무서리 내리는 늦가을부터 겨울이 다 가도록 빈 들판에 서 있자면 바람의 울음소리에 덩달아 눈물이 날 때가 있어. 사는 게 뭔가 싶은 게. 그나마 근방에 시금치 씨네 집성촌이 있어 다행이야. 언 땅에 뿌리를 내리고 북풍을 함께 견디는 이웃끼리 연대의식 같은 게 좀 있지. 녹색 연대라고나 할까. 그쪽 집안은 사람들에게 겨울철 부족해지기 쉬운 비타민, 철분, 엽산 같은 영양소를 공급하는 사명감에 산대. 보살이 따로 없어. 풍찬노숙하며 겨울을 나는 우리에게도 꿈은 있지. 그건 바로 겨우내 푸르름을 잃지 않는 우리를 보며 사람들이 삶의 희망과 용기를 키우도록 하는 거야. 그래서 더 초록빛 몸치장에 공을 들이는 편이지. 

 올봄에 바람이 유난했던 거 기억하지? 심술궂은 바람은 정말 싫다 싫어. 주인이 애써 씌워 놓은 멀칭비닐을 훌러덩 뒤집어 놓은 것만도 서너 번은 될 걸. 그래도 우리, 서로 서로 지탱하면서 낙오자 하나 없이 모진 시간들을 다 견뎌 냈거든. 꺾일지언정 쓰러지지 말자, 죽을 만큼 힘들어도 다시 일어서자, 이러면서 버텼거든. 인간들은 우리가 심어만 놓으면 절로 큰대. 풋! 그 무슨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그나저나 올해 가장 아픈 기억은 코로나19 때문에 봄이 실종된 거야. 형형색색의 꽃님들이 꼬박 일 년을 준비한 끝에 선보인 꽃 잔치가 소리 소문 없이 끝나 버렸잖아. 상춘객들의 인증 샷에 제대로 한 번 찍혀 보지도 못하고 말이야. 산수유, 매화, 벚꽃, 유채꽃, 튤립이 속절없이 낙화하는 모습을 보니 참 안됐더라고.

 우리한텐 그들처럼 화사한 매력은 없어. 하지만 기꺼이 이 한 몸 바쳐 사람을 살린다는 자부심은 있지. 한국의 코로나19 방역이 뜬 데는 이유가 있다고 봐. 세계적으로 한국인만큼 우릴 좋아하는 민족이 드물거든. 그래서 우리도 국적이 같은 당신들을 위해 기꺼이 공덕을 쌓으려는 거지. 나는 한국산 마늘, 당신은 한국사람. 내 말 맞지?

 마늘 수확기에는 주인댁 자손들이 외지에서 돌아와 일손을 거드니 제법 왁자해. 평소 얼굴 보기 힘든 새끼들을 만나게 해 준 것 같아서 보는 우리가 더 흐뭇하다고. 비록 우리는 정든 고향 밭을 떠나 도시로 팔려가지만 쥔장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고 떠날 수 있다면 그 또한 보람이자 기쁨이지. 거친 두 손으로 우리를 정성껏 돌봐준 인간에 대한 보은이라고나 할까. 암튼 우린 잊히기가 싫네. 그러니 올 가을 사랑으로 많이많이 심어 주길 부탁할게. 제발!

※ 남해군의 마늘재배면적은 2000년대 초까지 2000만㎡를 유지했으나 현재는 약 1/3 수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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