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와 겨울채비
상태바
가을걷이와 겨울채비
  • 남해타임즈
  • 승인 2020.10.22 11:29
  • 호수 7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연경의 남해일기

 황금물결로 넘실대던 남해의 가을들판은 가을걷이로 바빠졌다. 한여름 태풍과 벼멸구로 자식처럼 키워 온 나락을 논 한복판에서 많이 잃기도 했지만, 가을은 마음을 풍성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가을볕이 좋으면 엄마는 늘 무언가를 말렸는데, 추수한 나락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 마을회관 앞을 타작마당으로 삼아 커다란 갑바를 펴고 추수해 온 나락을 붓고 당그레로 휘이 저어 펴놓고, 시간간격을 두고 와서 맨발로 골을 만들어내며 나락을 뒤집었다.

 엄마가 골지어놓은 물결이 신기해 나도 따라 하다가 발바닥이며, 발가락 사이로 낱알이 붙어 콕콕 쑤셨다. 어른은 참을성부터 생기게 하는 갑다 싶었다. 

 나락알곡을 거둬낸 자리엔 거름으로 양분을 뿌리고 마늘 심을 준비로 여전히 바쁜 가을을 보낸다. 해가 서산으로 바삐 넘어갈 기미가 보이면 번개처럼 나타나 말려둔 나락을 갑바 한가운데로 모으고 네모로 감쌌다. 한낮의 볕을 받아 가슬해진 나락에 밤이슬을 맞히지 않으려는 이유였다.

 감은 껍질을 가지런히 깎아내고 처마 밑에서 잘 말려 곶감으로 두었다가 한겨울에 수정과에 넣거나 떡을 빚을 때 넣어 곶감떡을 만들었다.

 곶감은 말려 둔 양보다 거둬들이는 양이 적었다. 곶감이 되기 전 겉은 꼬들하고 속은 말랑해지면 먹성 좋은 형제들이 많이 빼먹었기 때문. 감을 껍질째 얇게 썰어 감말랭이로 만들면 자연이 준 간식이 되었다. 홍시가 되기 전에 감을 따고 까치밥으로 높은 나뭇가지에 두어개 남겨 두었지만, 요즘은 빈집이나 고령의 어르신이 많아 익을 대로 익어 사람의 수확보다 까치밥이 더 많아졌다.

 피마자 잎은 데쳐서, 호박은 얇게 썰어서 산대미에서 말려 보름날이면 참기름에 볶아 먹었다. 햇볕에 잘 말린 것들은 영양제를 따로 먹지 않아도 자연스레 비타민을 섭취하게 했다.

 고구마는 물고매를 삶아 길죽길죽하게 잘라서 말리면 쫀득쫀득한 말랭이가 되고, 생고구마를 굵은 채로 썰어 말리면 수분은 모두 제거한 빼때기가 되어 한겨울에 강낭콩과 설탕을 넣고 빼때기죽을 끓이면 겨울별미였다.

 여름 내 태양을 받아 붉을대로 붉어진 잘 익은 고추를 따다 마당에서 말리는 동안 고추를 밟지 않으려고 우리는 까치발을 하고 다녔다. 땅의 열기와 볕, 바람에 잘 마른 고추는 속의 씨까지 잘 익어 흔들면 딸랑이 장난감처럼 소리가 났다. 꼭지를 따내고 가위로 반을 갈라 씨를 털어내고 방앗간에서 가루로 빻아 김장준비를 하고, 아주 보드랍게 갈은 고춧가루는 메줏가루와 섞어 고추장을 담갔다.

 내가 어릴적 농촌에서는 채소정도는 남새밭에서 자급자족했기에 집집마다 햇볕좋은 날은 마을이 알록달록 했던 거 같다. 노란 호박, 초록 호박, 주황 감, 빨간 고추, 보라 가지, 황금빛 나락이 어울려 낸 그림마을이었다.

 긴 여름이 끝나고 바야흐로 가을이다. 추수가 끝나면 윤기가 자르르 흐르던 하얀 쌀밥을 고봉으로 담아 온 가족이 먹기도 전에 배부르던 때를 생각한다. 햇수확한 고춧가루로 담근 김치를 쭉쭉 찢어 김 나던 밥에 얹어만 먹어도 꿀맛 같은 시절. 엄마가 부지런히 겨울채비를 하는 동안 선친은 제2의 직업인 농부에 충실하느라 영농일기를 쓰고, 책을 사오고, 국화꽃을 심어 가을향을 즐겼다. 

 예전엔 영농 이모작으로 서로서로 품앗이를 하며 손발을 부지런히 움직여 휴경지를 보기 어려웠으나, 기계화가 되었지만 듬성듬성 이 빠진 것처럼 묵정논이 늘고 있다. 벼를 베어낸 자리는 짚냄새로 짙은 가을 냄새를 풍기지만 질긴 하얀비닐로 꽁꽁 랩핑한 곤포사일리지는 점점이 마시멜로 같은 볼거리를 준다. 건초가 없을 때 사료에 섞어 소의 간식으로 준다고 하니 농부는 겨울채비 하는 동안에도 동물사랑의 일인자다. 

 가을이라 마음이 공허하면 들판에 나가 농부의 부지런함을 배운다.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온 농부의 한결같음과 수십번도 더 손에 닿은 보물섬 쌀밥으로 농부의 수고로움을 의미하며 먹어야겠다.
 
※ 가을의 풍요로움을 주시는 농부님들 고맙습니다. 마음은 늘 풍년이길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