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첫사랑의 기억
상태바
가을, 첫사랑의 기억
  • 남해타임즈
  • 승인 2020.11.06 17:41
  • 호수 7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본지 칼럼니스트 │ 장현재
장  현  재본지 칼럼니스트
장 현 재
본지 칼럼니스트

"그 시간의 기억에서 당신을 지우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뉴욕 9/11 메모리얼 파크에 새긴 베르길리우스의 말로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지울 수 없음을 말한다. 이는 마치 우리 삶에서 어긋난 첫사랑의 기억과 같다.
룗먼 바다룘는 공지영의 열세 번째 장편소설로 이루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첫사랑, 대개 핑크빛을 떠올리지만, 룗먼 바다룘의 표지는 파도치는 회색 하늘빛으로 암시를 준다. 누구나 있을 법한 첫사랑에 대한 기억의 오르가즘은 돋을새김으로 가슴에 남아있다.
이 책은 1980년대 안타까운 어긋남으로 헤어진, 미호와 요셉이 뉴욕에서 40년 만에 재회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27개 장으로 보여 준다.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된 첫사랑을 40년 만에 만나는 미호의 이야기는 마치 영화처럼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펼쳐진다. 책과 마주한 동안 작가는 왜 40년을 강조했을까였다. 40년이란 유대민족이 이집트에서 나와 가나안을 향할 때 광야에서 헤맨 시간이다. 지금 거리를 환산하면 사흘이면 갈 거리를, 40년 동안 헤매게 한 이유는 육체에 스민 노예의 습성을 없애기 위한 시간이라 했다.
그러면 긴 40년의 만남을 뉴욕 자연사박물관 로비에서, 수억만 년 전 생존했다 발굴된 뼈만 남은 바로사우르스 공룡 앞에서 보자고 한 요셉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그 공룡 앞에서 어긋나 같이 하지 못한 40년이란 세월은 먼지처럼 보잘것없다는, 언제든지 함께하며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게 아닐까.
40년 만의 기억 소환, 뉴욕 자연사박물관과 9/11 메모리얼 파크를 걸으며 수억만 년 전 존재했던 생물들과 수많은 죽음과 삶이 교차했던 테러의 기록을 더듬지만, 둘 사이엔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시간의 숙제가 있었다. 해결점은 두 사람의 기억에 잘려 나간 필름을 되찾아 퍼즐을 완성하여 오해를 풀어야 하는 일이었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추억을 소환하는 일은 아픈 일이다. 특히 첫사랑은. 대개 첫사랑은 좋은 사람과의 만남 뒤에 늘 웅크리고 있는 현실의 압박으로 인해 통속소설처럼 끝나 버리는 양상이 많다. 이를 말하듯 미호를 아프게 한 1980년의 시대상과 요셉을 흔드는 가족들의 방해가 그렇다. 첫사랑은 가슴 보듬고 영원히 애이불비(哀而不悲)로 지내야 하는 숙명이지만, 삶에 있어 과거의 이루지 못한 추억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발효를 거듭하여 독소로 변하여 전신의 혈관을 누비며 괴롭게 한다.
40년 전몽유도에서의 밤, 요셉은 그들이 머물던 초등학교 교실 한구석에서 짐노페티를 연주한다. 그 찰나 그는 미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소리는 마치 우유 데우는 냄새를, 한 음마다 별 하나가 떠서 그녀의 가슴에 박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리고 현실, 40년 만에 재회한 맨해튼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는 선술집에서 울러퍼지는 짐노페티를 연주하는 초로의 그의 옆모습을 떠올린다. 그들의 첫사랑 빛깔은 따스한 에메랄드빛 서해바다였을까? 아니면 프로즌 마르가리타 빛이었을까?
첫사랑도 삶의 일부이다. 작가는 추억이란 상대가 아니라 그 상대를 대했던 자기 자신의 옛 자리를 반추하는 것이라 했다. 또한 얼마나 아팠으면 붉은 포도주가 지난여름을 기억하며 흘린 검은 눈물이라 했을까? 실연의 상처를 다독여주려는 미호의 엄마는 `돌아보니 아픈 것도 인생이야(중략) 피하지 않으면 돼. 우린 마치 서핑을 하는 것처럼 그 파도를 넘어 더 먼 바다로 나갈 수 있게 되는 거야`라며 위로의 말을 던지지만 미호에게 위로가 되었을까?
이 책은 살아가는 일, 사랑하는 일에 대해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지며 깊은 여운을 준다. 삶은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춤추고 있다. 과거의 사랑은 이루지 못한 상처다. 그건 서로 간의 오해일 수도 있다. 그 과거로 인해 정지된 아픈 삶을 산다는 것은 큰 부담이다.
이를 대변하듯 책의 후반부에서 40년 후 해후를 통하여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이 맞춰졌을 때, 잔잔한 바다는 비로소 부드러이 파도를 치기 시작한다. 맨해튼의 짧은 만남과 이별, 늦은 밤 그녀에게로 찾아오는 요셉의 모습, 이 해후의 불빛은 과거가 다시 현재를 다르게 색칠해 온다. 정지된 것이 아닌 새로운 파도를 일렁이게 한다.
우리는 살아간다. 파도도 만난다. 그러면 어떻게 파도를 넘겨야 할까? 먼바다는 깊어가는 가을날 따스한 차 한잔과 같이 짐노페티를 들으며 주어진 시간을 더 멀리서 바라보는 힘이 필요함을 알려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