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 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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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 두 개
  • 남해타임즈
  • 승인 2020.12.28 14:40
  • 호수 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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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세이 │ 박귀자(고현면 포상출생.부산향우)
박  귀  자고현면 포상 출생 / 고현초, 고현중, 진주여고, 부산교육대학교 졸업 / 부산에서 초등학교 교사, 교감, 교장 지냄 / 현재 부산광역시교육연수원 부장(교육연구관)으로 근무 중.
박 귀 자
고현면 포상 출생 / 고현초, 고현중, 진주여고, 부산교육대학교 졸업 / 부산에서 초등학교 교사, 교감, 교장 지냄 / 현재 부산광역시교육연수원 부장(교육연구관)으로 근무 중.

요즈음 `호모 헌드레드`가 화두다. 백세까지 산다는 말이다. 보통사람도 첨단과학과 의료기술 덕분에 100세까지 살고픈 욕망을 꿈꾼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이미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고, 초고령사회도 목전이라고 한다. 백세시대가 현실화된 셈이다.
오래 산다는 것은 그지없이 복된 일이다. 그러나 수명이 길어지면서 생기는 사회현상을 보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생활에서 겪는 외로움이나 경제적인 어려움 등 문제가 있다. 그 중에 노인문제가 심상치 않다. 노령층 빈곤율이 점차 확대되고 노인의 절반이 빈곤에 시달린다고 한다. 경제적인 문제를 가지고 가까운 가족이나 친지간에 갈등을 겪고 화합하지 못하는 사례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온 사회가 함께 몸살을 앓는다.
한 설문결과를 보면 더 씁쓰레하다. 서울의 모 교수가 대학생들에게 부모가 언제쯤 죽으면 좋겠느냐고 희망을 조사했다고 한다. 그 물음에 63세라고 답한 수가 가장 많았다 하니 놀랍지 않은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묻는 항목에서는 무시무시하다. 부모가 은퇴해서 퇴직금을 남겨주고 죽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기 때문이라고 응답했단다. 우리네 삶에 아무리 돈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한다 싶어 바짝 긴장이 된다. 
그래서일까. 호모 헌드레드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이다. 큰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은데 뜻대로 실행할지 모르겠다.
한 달 전 아흔여섯 해를 살아오신 외할머니의 생신이었다. 읍내 작은 식당에서 동네 어른들을 모시고 조촐하게 축하연을 가졌다. 제일 연장자인 할머니는 생애 마지막 잔치일 것 같다고 참석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셨다. 90도 굽은 허리를 세우며 생일 소회를 밝히셨다. 삼시 세끼를 챙기고 고이 잠자는 일만 하는 처지라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밥만 축낸다고 미안해하셨다. 언제까지 무슨 일을 더 하고 싶은지 살짝 궁금했지만 다음으로 넘어갔다.
이어 노래자랑이 열렸다. 주인공인 할머니의 자축노래부터 시작되었다. 작년 생일에는 `멋진 인생`을 불렀는데 올해는 곡목을 바꾸셨다. `이별의 부산정거장`이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할머니의 노래가 삼절까지였다. 참석자들 모두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며 옷소매를 적셨다. 한 많은 기적소리도 따라 울었다.
할머니는 나의 롤모델이다. 할머니는 손마디가 휘어지고 열 손가락 지문이 닳아 없어지도록 흙일을 하신다. 집 마당에 심어 가꾸는 고추나무가 비바람에 잘 견디기를, 고추잠자리처럼 잘 물들기를 바라신다. 믹스커피 한 잔이면 족하다 하시고, 값지고 맛있는 음식은 드실 줄 모른다 하시며, 다른 사람 앞에 먼저 내밀고 사신다. 한더위에도 할머니 한 몸이야 손부채 하나면 충분하다고 하신다. 신세진 사람은 저 세상에서도 잊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해마다 봄이면 제비가 찾아와 할머니댁 처마에 지은 제비집까지도 고마워하신다. 나도 백 살쯤 되었을 때 딱 할머니처럼 살고 싶다.
할머니는 통장 두 개를 가지고 있다. 물론 많은 돈은 아니다. 하늘의 부름을 받아 할아버지 곁으로 가는 날 필요하다고 하신다. 통장에는 크고 또렷한 꼬리표가 붙어 있다. 선물용과 장례비용이다. 하나는 할머니의 꽃상여를 태워줄 동네 젊은이들에게 줄 체육복과 운동화 값으로 몫이 매겨져 있고, 다른 하나는 외할머니 본인의 장례비용이다. 이웃들이 일체 부담을 갖지 않도록 부조 없이 장례를 치를 것을 당부하신 바 있다. 그 통장에는 백세시대 할머니의 땀과 희생과 배려가 오롯이 담겨있다.
휴일이라 오랜만에 할머니를 찾았다. 주말연속극을 좋아하시는 할머니는 한쪽 귀가 잘 안 들려도 내용을 대충 이해하신다. 연속극이 끝나고 뉴스 시간이다. 사건사고 소식에는 별 관심이 없으신 것 같은데 내 마음이 아프다. 하필이면 할머니가 통장을 개설한 은행의 금융시스템이 해킹을 당했다고 한다. 스미싱이다 보이스피싱이다 하면서 사이버시대의 부작용과 폐해가 보도된다. 투덜거리며 흉흉한 세상인심을 탓해본다. 할머니의 표정을 살핀다.
뉴스가 끝나면 할머니 이름으로 된 통장을 챙겨보려던 참이다. 바로 그때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우리 동네는 인심 좋은 사람들만 사니까 저런 나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기라."
할머니에게 좁은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다. 어색한 시간이다. 할머니의 시선을 피하려고 얼른 서랍을 열어 동전주머니를 꺼낸다. 치매를 예방하는 데는 이만한 일이 없다며 퍼즐 맞추기를 권한다. 판을 바꾸어가며 100원씩 내기를 한다. 할머니는 재밌어서 날마다 하면 좋겠단다. 아이처럼 좋아하는 할머니를 뒤로하고 집으로 오는 길 내내 마음이 짠하다.
부산에 도착하여 전화를 드렸다. 손녀의 먼 길 운전을 염려하는 할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할머니의 음성은 부드럽다. 언제나처럼.  
"늘 너희들이 걱정이제. 나는 걱정할 게 없다. 나는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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