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그믐날 숨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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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그믐날 숨은 이야기
  • 남해타임즈
  • 승인 2021.02.04 10:54
  • 호수 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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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현 재본지 칼럼니스트
장 현 재
본지 칼럼니스트

 일주일 뒤면 음력 섣달그믐날이다. 한해를 마감하는 날 `덜리는 밤`으로 제석(除夕), 제야(除夜)라 했다. 또 옛사람들은 `나갔던 빗자루도 집을 찾아온다` 하였다. 그러나 이번 설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지난 추석처럼 `며느라, 올 설에는 오지 마라`는 말이 낯설지 않을 것 같다. 사람과의 만남과 가족의 정이 더 그리워진다.

 음력 섣달그믐날 풍습을 돌아본다. 지방마다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면이 많다. 섣달그믐은 속칭 `작은 설`이라 하여 묵은세배를 올리는 풍습이 있다. 민가에서는 사당과 가묘, 어른들께 묵은세배를 드렸다. 이는 한 해가 무사히 간다는 뜻으로 드리는 인사이다. 

 또한 이날을 까치설이라고 하는데 그 연유는 신라 소지왕 때 궁주(宮主)와 중이 공모하여 왕을 해치려 하였는데, 까치와 쥐, 돼지의 인도로 이를 모면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쥐와 돼지는 설날부터 열이튿날까지의 날로 열두 동물의 간지가 새해 처음 오는 상십이지일(上十二支日)에 들어가는 동물이라 설날 이후 쥐날, 돼지날이라 기념하지만 불행히 까치를 기념할 날이 없어 설 바로 전날을 까치의 날이라 하여 `까치설`이란 이름이 유래하였다 한다.

 설을 앞둔 세밑은 참 분주하다. 집마다 부뚜막 헌 곳이 있으면 새로 바르고 외양간도 치우고 고치며, 거름도 퍼내어 설 맞을 준비를 한다. 그믐날 마당을 깨끗이 쓸어 그 쓰레기를 이용하여 마당 한구석에 모닥불을 피우는데, 이는 모든 잡귀를 불사른다는 신앙적 속신도 있다. 그리고 섣달그믐날은 한 해 동안의 거래 관계를 이날 모두 청산하는 관행이 있었다. 설날 준비도 하랴 여러모로 바쁜 총중(悤中)에도 밤중까지 빚을 갚고 받으러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자정이 지나가면 정월 보름까지는 빚을 독촉하지 않는 것이 상례 였다. 이는 묵은해를 보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경건하게 맞이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섣달그믐날밤에는 잠을 자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아마 어릴 적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되고 굼벵이가 된다고 하여 잠을 자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 풍습은 사람의 몸에는 생명을 관장하는 신으로 상시(上尸)·중시(中尸)·하시(下尸)의 삼시(三尸)가 있는데, 사람의 잘잘못을 기록해두었다가 연말 경신(庚申)과 갑자(甲子)의 날 밤중, 사람이 잠들면 신체로부터 빠져나와 승천하여 생명을 맡은 사명도인(司命道人)에게 그 사람의 과실을 보고하여 벌을 준다고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병에 걸려 죽게 되므로 삼시가 몸에서 빠져나가 하늘로 올라가지 못 하게 하려고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잠을 자는 것은 영원히 자는 것 처럼 죽음을 뜻하기 때문에, 밤을 새우며 새롭게 시작하는 날과 그 전 해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함을 암시한다.

 불을 밝히고 잠을 주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방, 마당, 부엌, 외양간, 변소 등 집 안 구석구석에 밤새도록 불을 밝혀 놓으니 환해서 좋았다. 이는 잡귀의 출입을 막고 복을 받는다는 도교의 영향으로 수세(守歲)라고 한다.

 유년 시절 시골집 부엌에는 복판 벽에 조왕단이라는 돌출 부분에 조왕수를 놓아 조왕신을 섬기는 풍습이 있었다. 어머니는 부엌신인 조왕님을 연중 정성스레 모셨다. 그 이유는 일 년 내내 그 집안사람들의 소행을 낱낱이 지켜보았던 조왕님이 섣달 스무나흗날 승천하여 옥황상제에게 낱낱이 고해바친다. 그 승천 보고에 따라 선행이 많으면 응분의 복을, 악행이 많으면 응분의 화를 내린다. 곧 새해의 길흉화복이 조왕님의 보고에 달려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조왕신은 지난해를 심판받고 새해의 길흉을 받아들고서 섣달그믐날 밤 부엌을 통해 들어온다. 조왕님이 돌아오시는 날 밤, 부엌을 비롯하여 집안 곳곳에 등불을 켜 잡귀를 쫓은 다음 경건하게 자신의 운명을 기다리며 밤샘을 했다. 이는 우리 민족이 신(神)과 직결된 자신의 양심에 되돌아오는 유일한 시간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섣달그믐날 밤 제일 무서운 귀신은 야광기다. 유년에 어머니는 섣달그믐날 밤 대문 밖을 나가면 걸리는 것이 귀신이라고 했다. 집에 있지 않고 싸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려고 겁을 준 말이 아닐까 한다. 야광귀는 양괭이라고 부르는데 신발을 훔치는 귀신이다. 야광귀는 맨발 귀신으로 섣달그믐밤에 나타나 신발을 신어 보고, 제 발에 맞는 신발 특히, 발이 작은 아이들의 신발을 신고 달아난다. 이때 잃어버린 신발 주인은 병을 앓거나 재수가 없다. 그래서 신발을 방에 감추거나 엎어 놓기도 하고 야광기가 못 들어 오도록 마루 벽 대문에 체를 걸어 놓거나 문지방 위에 엄나무 가지를 걸어놓았다.

 그런데 이 야광귀에도 약점이 있다. 세는 것을 좋아하는데 세다가 잊어버리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구멍이 촘촘한 체를 세다가 새벽닭이 울면 다 못 세고 도망간다. 사람들은 이 새벽닭이 울 때까지 잠을 자지 않기 위해 화롯가에 둘러앉아 옛날이야기며 윷놀이, 망년주를 마신다.
 설은 유년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유년시절 파랑새 되어 날던 섣달 그믐밤, 환희의 밤은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세월의 먼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하얀 눈이 내리는 고향의 산하에 설을 알리는 뒷산의 산새 소리, 앞 냇가 고드름은 추위에 떨고 마굿간 황소는 하품을 한다. 지금은 떠나고 없는 어른들, 정답던 이웃들이 보고 싶어지고 되돌릴 수 없는 수많은 날들이 섣달그믐날 생각 속으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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