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성 마을 섣달그믐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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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 마을 섣달그믐 밤
  • 남해타임즈
  • 승인 2021.02.04 10:57
  • 호수 7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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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 나의 삶 75
碧松 감충효 │ 시인ㆍ칼럼니스트
碧松 감 충 효 시인 / 칼럼니스트
碧松 감 충 효
시인 / 칼럼니스트

   양력으론 올해가 지나갔지만 우리의 음력 섣달그믐과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정월 초하루 설날은 따로 존재하고 그것이 가슴 깊이 내재되어 있음을 해마다 느끼곤 하는데 올해도 그 정서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필자 평생 잊지 못하는 우리의 풍습이면서 애향심과 효성과 우애와 우정의 바탕이었던 이 날이 잊혀져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섣달 그믐밤이면 고향의 오랜 역사 속으로 들어가서 조상님은 물론 조선시대 당대의 고관대작을 만나볼 기회를 갖는다. 왜냐하면 섣달그믐의 그믐제는 이 지방에 유배오신 당대 유배객들이 남기신 궁중풍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믐날 집안 대청소를 시작으로 설날 제사 음식 준비가 한창일 때 타향객지에 계시던 삼촌, 숙모, 고모, 형, 누나들이 돌아오시면서 갑자기 집안은 떠들썩해진다. 오시는 분들의 선물 보따리에 조카들과 동생들은 입이 함지박만치 벌어지고 그동안의 타향객지에서 겪은 이야기꽃이 활짝 피어난다.

 해가 지면 촛불과 호롱불이 일제히 켜지면서 깨끗이 청소된 집 안 곳곳에 걸린다. 대문, 각 방, 부엌, 처마, 우물, 대청마루, 창고, 헛간, 화장실, 짐승우리에까지 환히 밝힌다. 환하게 해서 조상님이 오시는 길을 밝혀 드리고 모든 잡귀나 액운을 물리친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고장 풍습에 협조라도 하려는 듯 남문 밖 남산 아래의 봉천변에 위치한 한국전력 변전소에서는 섣달 그믐날 밤만큼은 밤새도록 전력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그 때는 전력이 부족해 제한 송전으로 밤 10시가 되면 단전하던 시절이었다.

 할아버지 살아실 제 심었다는 특별한 단감나무의 감은 보통 단감보다 두 배나 더 컸고 보라색 점이 박혀있는 과육의 단맛도 청량하였으며 입 안에 사르르 감도는 향기 또한 독특하였다.
 옛날 읍성의 밑돌 흔적의 글이 새겨져 있는 엄청나게 크나큰 돌로 쌓은 돌담에 기대어 선 오래된 뽕나무 세 그루에서 열리는 뽕잎으로 할머니께서는 양잠을 하셨고 직접 뽑은 명주실로 명주 베를 짜셨는가 하면 설날에는 며느리들에게 몇 필씩 선물로 내려주시기도 하셨으며 뽕나무에 열리는 질 좋은 오디는 초여름 한 철 필자와 동생들의 소중한 간식거리였다. 필자는 해마다 이 감나무와 뽕나무에 호롱불을 따로 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찍 일어나 떡국과 생선 등 제물로 새벽 일찍 설 차례를 모시고 곧 가까운 조부님의 산소에 성묘를 갔다 온 뒤에야 집안에서 세배가 시작되고 동네 모든 집으로 어른들을 찾아 세배를 떠난다. 필자의 마을은 100가구가 넘었는데 하루 동안에 다 다닐 수 없어 초사흘까지는 세배가 이루어졌고 초닷새까지가 설이라 하여 먼 곳 외갓집이나 먼 친척집에도 세배를 갔었다.

 세시풍습이 상전벽해처럼 변한 지금, 옛 풍습을 떠올려 보고 고향에 내려감은 그나마 숭조사상(崇祖思想)과 경로효친(敬老孝親), 조상의 얼 이어받기 등 요새 와서 경시되고 있는 인간본연의 덕성과 덕목에 대한 가치를 상실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배문학관을 들러 우리 고향에 유배문학의 향기를 뿌리고 가셨던 분들의 흔적도 만나보고 특히 우리 죽산동네와 크게 인연을 맺었던 소재(疎齊) 이이명 선생의 넋이 어린 봉천사 묘정비 비문도 다시 한 번 새겨 읽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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