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3·1 만세운동 기록한 육필원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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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3·1 만세운동 기록한 육필원고 나왔다
  • 한중봉 기자
  • 승인 2021.03.11 10:56
  • 호수 7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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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운동 주도한 정몽호 선생 6쪽 분량 원고
아들 정창주, 남해문화원 통해 세상에 알려

 기미년(1919) 남해 3·1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 중 한 분인 정몽호 선생의 육필원고가 발견됐다. 이 육필원고는 1919년 4월 초순 남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재조명해 볼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소는 3월 초 남해독립운동사 편찬을 위해 자료를 수집하던 중 정몽호 선생이 당시 활동상황과 옥고를 치른 얘기를 직접 써서 남긴 원고를 아들 정창주 박사(90·전 서울대 농과대학장)로부터 전해 받아 이를 공개했다.

 이 육필원고는 표지를 포함 모두 6매 분량이다. 김정일 남해항일운동사 집필위원이 본지로 보내온 정몽호 선생의 육필원고 내용을 싣는다. 


3·1독립만세 당시 활동상황 및 옥고담 등
공적서 기미3·1운동 사실록(己未三一運動 事實錄)
 

남해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정몽호 선생의 육필원고의 첫 장. 三.一獨立萬歲 當時 活動狀況 및 獄苦談 等(`3.1독립만세 당시 활동상황 및 옥고담 등)이라 기록돼 있다. / 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제공
남해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정몽호 선생의 육필원고의 첫 장. 三.一獨立萬歲 當時 活動狀況 및 獄苦談 等(`3.1독립만세 당시 활동상황 및 옥고담 등)이라 기록돼 있다. / 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제공

 우리 남해군(南海郡)은 4면(四面) 환해(環海)의 도서(島嶼)로서 교통(交通)이 불편(不便) 중(中) 1919년 3월 1일 거족적(擧族的)의 자주독립만세(自主獨立萬歲)는 서울에서 손병희선생(孫秉熙先生) 외 32인의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와 지도(指導)를 기미년(己未年) 2월 20일에 받은 이예모(李禮模)는 3월 2일 밤에 남양교상(南陽橋上)에서 금음(金音)까지 만세(萬歲)를 화창(和唱)했다.
 또 손병희선생(孫秉熙先生)의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받은 문항강명재생(文港講明齋生) 중 정학순(鄭學;淳), 정몽호(鄭夢虎), 정순조(鄭順祚), 정임춘(鄭任春)등은 한학선생(漢學先生) 정상기(鄭相基) 에게 승락(承落)을 받고 철권면기(撤券面起)하야 주야불구(晝夜不拘)하고 면내(面內) 각동(各洞) 정익주(鄭益周), 윤주순(尹柱舜), 유찬숙(柳贊淑) 정흥조(鄭興祚), 정재모(鄭栽模) 등과 연락(連絡)하여 남해읍대시장(南海邑大市場)에 가서 대대적(大大的)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병창(竝唱)하기로 상호결의(相互決議)하여 각자(各自) 태극기(太極旗) 수백매를 준비하여 4일 시장(市場)에는 은밀(隱密)히 지참(持參)하여 동서남북(東西南北)으로 병립(竝立)하여 즉각(卽刻) 태극기를 펴여들고 큰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병창(倂唱)케 하고, 만시(滿市) 군중(群衆) 수백명을 수삼번(數三煩) 화창(和暢)한 후 정순조(鄭順祚), 정용교(鄭鎔交). 정임춘(鄭任春) 등이 선봉대장(先鋒隊長)이 되야 태극기를 높이 들고 시위운동(示威運動)하야 각관서(各官署)로 통과(通過)하면서 각기관장 등을 색출(索出)하여 대한독립만세를 화창(和唱)케하고 귀로(歸路) 읍면(邑面) 고현면(古縣面) 설천면(雪川面)각 리 방방곡곡(方方谷谷)에서 독립만세소리 천지(天地)가 진동(振動)케 했다. 

정몽호 선생의 육필원고의 마지막 장. 三一 同志會 生存者 鄭夢虎(삼일 동지회 생존자 정몽호)라 써 있다. / 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제공
정몽호 선생의 육필원고의 마지막 장. 三一 同志會 生存者 鄭夢虎(삼일 동지회 생존자 정몽호)라 써 있다. / 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제공

 그 익일(翌日)에 삼천포경찰서(三千浦警察署)에서 경찰대(警察隊)와 수비대(守備隊) 수십 명이 래면(來面)하야 남해자주독립만세 주동선배(主動先輩)들을 모조리 체포(逮捕)하야 삼천포서(三千浦署)로 인행(引行)해가 혹독(酷毒)한 고문(비공(鼻孔)에 주수(注水)와 수지(手指)에 죽침(竹針) 등 별별(別別) 형(刑)을 당하고 약 10일 만에 진주감옥(晉州監獄)으로 이동(移動)하여 미결(未決)에서 질곡(桎梏)한 왜정치하(倭政治下)에 철방(鐵房)에서 5개월간 있다가, 예심판결의 수형(受刑)하였으나 혹은 불복하고 대구로 공소(控訴)했고 혹은 판결언도(判決言渡)되야 부득이(不得已) 복역(服役) 중 옥사(獄死), 장기복역(長期服役) 중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일방(一房)에 약 25명 식 입숙(入宿)케 하야 야침(夜寢)이 불안(不安)하고 콩과 절미(切米)로 작반(作飯)하야 밥의 등급(等級)이 1등부터 9등까지 구분분식(區分分食)케 하고 반찬은 된장국에 염포가리이다.
 만약 명령(命令)에 위반(違反)하면 1주일간 내 감식(減食)하야 겨우 연명(連命)케 하는 등 비통(悲痛)의 고민(苦悶)을 당하고 2년 반(半) 만에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한 몸으로 귀가(歸家)했다. 출옥(出獄)하고 보니 동지자(同志者)들 중 옥사(獄死), 혹은 출옥(出獄) 후 즉 병사(病死)도 있고 생계곤란(生計困難)하야 유리포식(流離飽食) 중 동사자(凍死者)도 있고 혹은 행방불명자(行方不明者) 혹은 3.1절에 분사자(憤死者)도 있었다.
 
 8.15해방(解放) 즉후(卽後) 남해노량충렬사(南海露梁忠烈祀)에서 본 운동(本 運動)에 참가인(參加人) 중 옥사자(獄死者)에 위령제(慰靈祭), 동유족(同遺族)과 생존자(生存者)에게는 향연(饗宴) 일장회동지하(一場會同之下)에 삼일동지회(三一同志會)를 조직(組織)한 것은 영영(永永)히 우리 조국(祖國)을 충성(忠誠)하며 자손만대(子孫萬代)에 애국정신(愛國精神)을 계계승승(繼繼承承)하야 독립국가(獨立國家)로서 세계만방(世界萬邦)에 빛내게 하는 바이다.

 삼일동지회 생존자 정몽호
(三一 同志會 生存者 鄭夢虎)
 남해군 설천면 문항리 103
(南海郡 雪川面 文港里 103)
 1898년 10월 4일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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