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성산토성은 전야산군의 치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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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성산토성은 전야산군의 치소였다?
  • 남해타임즈
  • 승인 2021.04.01 11:03
  • 호수 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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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군 기록이야기 33 │ 여창현 남해군 학예연구사
남해 성산토성 전경과 발굴대상지.
남해 성산토성 전경과 발굴대상지.
여 창 현 남해군문화관광과학예연구사
여 창 현
남해군문화관광과
학예연구사

 남해군에는 22개소에 달하는 성곽이 남해도와 창선도에 고루 분포하고 있으며, 산성, 진성, 장성, 읍성, 왜성 등 종류도 다양하다. 시기적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축성된 성곽이 분포하여 과거부터 이 지역이 해로를 통제하고 외침에 대비한 국방상의 요지였음을 알 수 있다.

 남해 성산토성은 조선시대에 축성된 고현산성에 의해 일부 성벽이 훼손되었으나 현재 약 150m 정도 잔존해 있다. 지난 2018년 발굴 조사된 지역은 행정구역상 남해군 설천면 비란리 산127-3번지 일원으로 고현면 도마리와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다. 성산토성 기준으로는 비란리 방향은 토성의 외벽, 도마리 방향은 내벽에 해당한다. 성산토성은 이미 내벽 일부가 노출돼 있어 확연히 토성임을 알 수 있다. 

 성산토성과 관련해서 신문왕 10년(690) 겨울 10월 전야산군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남해군은 신문왕이 처음 설치한 전야산군으로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이다. 경덕왕이 명칭을 고쳤는데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 영현은 둘이다. 난포현은 본래 내포현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 평산현은 본래 평서산현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고 하였다. 이후 경덕왕대에 전야산군을 남해군으로 명칭을 개명하였다.

성산토성 단면 토층 모습.
성산토성 단면 토층 모습.

 남해 성산토성은 내외벽에 기단을 갖춘 기단석축형 판축토성에 해당하며, 전야산군의 치소로 비정되는 남해군의 중심이 되는 성곽이다. 토성의 축조수법을 보면, 먼저 토성의 기저부 조성은 기반층을 `L`자 상으로 굴착하여 경사진 구간을 단차를 두어 수직으로 만들었다. L자의 굴착 지점을 판축하여 내벽까지 다져 올린 후 중심 토루를 만들었다. 기저부에는 체성 자체가 외부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 석열을 쌓았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토성에 석축을 붙이는 형태로의 전환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산토성의 북동쪽에 위치한 대국산성이 전야산군의 치소로 비정되는데, 이는 대국산성의 발굴조사자가 축성연대를 7세기 초반으로 보고 있으므로 7세기 말의 전야사군 설치와는 다소 시기적인 차이가 있다. 대국산성은 최초 남해 지역의 거점성으로 인접한 사천지역과의 연계 속에 군사적 목적으로 기능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행정적인 치소도 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통일 이후 대내적인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신라 각 지역의 치소성이 산성 중심에서 낮은 구릉의 평산성 중심으로 이동된 양상이 다수 확인된다. 이러한 치소의 이동 과정에서 성산토성은 기존의 대국산성과 인접한 현재의 위치인 도마리, 비란리 일원의 저구릉을 선택하여 새로 축성하였을 것이다. 성의 방어에 있어 군사적인 이점은 다소 덜하더라도 지방 지배의 거점인 행정적인 치소로서의 유리함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성산토성 내벽 전경과 세부 모습.
성산토성 내벽 전경과 세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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