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봉주의 헌신, 이동초의 잃어버린 10년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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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주의 헌신, 이동초의 잃어버린 10년을 찾다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1.04.08 11:26
  • 호수 7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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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학교에 이어 사립동명학교에 이르기까지
1910년 아닌 1900년 개교 근거 제시

이동초등학교(교장 김선자)는 올해 1월 7일부터 7월 5일 완공을 목표로 역사관이 포함된 시청각실을 건립하고 있다. 이동초에 역사관이 들어서기까지 `이동초등학교 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정봉주)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위원회는 역사관을 건립하는 것 이외에도 역사관을 채울 수 있는 사료들을 모으고 있으며 제보와 기증을 받고 있다. 이에 이동초총동창회를 비롯해 남해와 서울, 부산 지역 동문들이 동참하고 있다.
2001년부터 이동초등학교 개교 100년사와 역사관 건립까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던 정봉주 위원장은 20년이 넘게 현재까지도 고증이 될 만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고 자료를 수집하며 연구한 결과, 이동초의 개교일이 현재 기록된 1910년 4월 1일이 아니라 최소 1900년이라는 것을 밝혔다. 정봉주 위원장이 주장하는 근거에는 일제강점기와 조선총독부(1910년~1945년 8월 15일) 관보와 1900년대 초반 신문기사, 이동초 출신 선배들의 학교 문서와 증언 등이 있다.
이동초등학교의 잃어버린 10년의 역사를 찾기 위해 지난달 2일부터 1개월간 정봉주 위원장을 수차례 만났고 그가 보유하고 있는 자료를 검토하고 설명을 들었다.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이동초의 역사를 되짚어 본다. <편집자 주>

 

정봉주 이동초등학교 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2일 이동면 소재 카페 네발자전거에서 무수한 자료와 함께 이동초등학교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정봉주 이동초등학교 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2일 이동면 소재 카페 네발자전거에서 무수한 자료와 함께 이동초등학교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1900년 동영학교
1910년 사립동명학교

 그동안 이동초등학교는 1910년 사립동명학교 설립을 효시로, 지금까지 역사가 이어져 오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정봉주 이동초등학교 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에 따르면 이동초 최초의 전신은 `동영학교`다. 설립자는 당시 재력가이자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수제자인 최효석 초대교장이며 동영학교의 설립연도는 1900년이라고 기록돼 있지만, 날짜는 현재 개교기념일과 같은 4월 1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최효석 가문의 족보와 지산유집 책자 등에 명시돼 있다. 
 근거 중 하나로는 1926년 11월 20일에 발간된 매일신보 신문에 "남해군 삼동면에 있는 동명공립보통학교는 지금으로부터 26년 전(1900년) `동명사립학교`로 창설됐다"고 보도돼 있다. 이와 함께 1909년 12월 29일 발간된 경남일보 기사에는 "남해군수 홍성욱은 사립육영학교 김영두 교감을 대동하고 창선면 흥선학교, 삼동면 동영학교를 시찰했다"라는 내용으로 보도돼 있다.


 여기서 의문점이 생길 것이다. 앞서 1900년에 학교가 설립될 때에는 `동영학교`인데 매일신보 기사에는 `동명사립학교`라고 보도하고 있으니 말이다. 


 학교의 이름이 다른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당시 조선총독부 관보를 보면, 1911년 10월 20일부터 학교 이름에 `사립`을 사용하라고 공표했다. 이 명칭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일본 위주의 공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일제강점기 이전 즉, 1910년 이전의 학교들은 사립학교로 구분 짓기 위함이다.


 1910년 1월 29일자 경남일보에는 "남해군에서는 기인가 된 학교는 없으며, 청원 중인 학교명은 도명(남해면, 화방사) 육영(남해), 집영(고현면), 흥선(창선면), 동영(삼동면) 5개교이다"라는 내용이 보도돼 있다. 이 기사를 미뤄볼 때 사립학교와 공립학교 구분을 앞두고 5개의 학교는 정규학교로 인가받기 위해서 신청했지만, 모두 인가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동영학교는 사립각종학교로 분류되며 이름도 사립동명학교로 전환하게 됐다. 이는 다른 읍면의 학교들이 이름을 바꾼 것과 같은 의미다.


 또한 사립동명학교는 최효석 교장의 동생인 최현석 교감이 승진해 교장직을 수행한다. 이러한 내용은 1912년 5월 29일자 매일신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함께, 1909년 4월 24일자 황성신문에 따르면 최효석 설립자의 셋째 아들이자 삼동면장과 경남도의원을 역임한 최익수 씨는 1909년 육영학교 중등과정 2학년 학생 중 우등생으로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고 보도돼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중등교육 과정을 받기 위해서는 초등교육 과정을 필히 받아야만 하기 때문에 최소 1904년에 동영학교가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특히 1910년 11월 11일자 경남일보를 보면 조선인의 각종 사립학교의 수가 나온다. 기사에는 "도내 각 학교 수 본년(1910년) 9월 말까지 조사한 본 도 각 군에 조선인의 각 공 사립학교의 수가 아래와 같다"며 "사립동명학교(삼동면) 직원 4명, 학생 수 40명, 1년 경비 336,640(단위 미기재, 당시 화폐 가치를 고려했을 때 추정 단위는 원으로 현재 기준으로 환산하면 33만6640원)"이라고 보도했다. 이와 함께 집영학교(고현면)에는 직원 3명, 학생 수 50명, 1년 경비 43만3000원(현재 기준, 추정)으로 보도돼 있고 흥선학교(창선면)에는 직원 4명, 학생 수 47명, 1년 경비 29만7000원(현재 기준, 추정)으로 보도돼 있다.


 금액에 대한 근거는 룗사립학교의 기원룘(강명숙 저, 194쪽)에 수록돼 있다. 책에는 사립각종학교 1년 예산은 100원에서 최고 1263.5원으로 돼 있다. 즉, 사립동명학교의 1년 예산은 100원과 1263.5원 사이의 336원 64전인 것이다. 


 덧붙여, 현재 이동초등학교 문서고의 여러 자료 중 최낙준 씨의 이력서를 보면 알 수 있다. 최낙준 씨는 1930년도에 이동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했다. 그의 이력서에는 1908년도에 동영학교에서 3년의 과정을 이수했고, 화광의원을 운영하며 한의사로서 현재의 이동면 용소마을, 화계마을과 신전마을, 원천마을, 상주면 상주마을과 양아마을 등을 출장을 다닌 기록이 있다.


 아울러, 1910~1912년 사립동영학교에는 졸업생이 없었으며, 1916년 3월 제4회 졸업생인 제2대 국회의원이자 제4대 체신부(遞信部) 장관 역임한 조주영 선생과 동기들이 1912년 4월(사립동명학교 제1기 입학생) 입학생은 4년간 학적부가 존재한다. 이는 설립인가를 받은 학교가 사립동명학교이기 때문이다.


 한편, 1905년 일제 통감부 설치 후 초등학교 과정은 1906년 8월 27일에 공포된 「보통학교령」에 의해 이전의 6년(소학교)에서 4년으로 단축됐다. 1926년 7월 1일 「소학교령」에 의해 보통학교와 소학교 구분 없이 심상소학교라는 명칭으로 바뀌며, 수업연한도 6년으로 연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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