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잔인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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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잔인한 달
  • 남해타임즈
  • 승인 2021.04.16 11:11
  • 호수 7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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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의 남해일기

1. 4월 16일
 아기자기한 벚꽃잎이 함박눈처럼 흩날리고, 유채꽃의 야광색에 눈이 부시고, 왕관을 쓴 튤립에 마음을 모조리 빼앗기던 2006년 쌍춘년 4월 16일, 나는 꽉 채운 계란 한 판일 때 혼례식을 올렸다. 콩깍지가 제대로 씌어야 한 남자, 한 여자를 세상에 이만한 사람 없노라 생각하며 배우자로 맞는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나의 면사포 인연을 향해 정열의 붉은 카펫을 즈려밟았다. 


 결혼기념일은 신용카드 결제일만큼이나 잘 돌아왔다. 결혼기념일 10주년에는 멀리 여행도 가고, 서로에게 기념이 될 만한 선물도 해주자고 남편과 약속도 했다. 결혼은 둘이서 했는데, 선물은 나만 받았다. 선물을 준비 못한 나의 핑계거리는 `감각이 없어 어떤 걸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 시장 가서 생선회만 사 왔다`였다.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은 일찍부터 매스컴에서 잘 알려주지만, 우리는 이제 결혼기념일을 챙기지 않고 살고 있다. 


 4월 16일, 그날은 내가 은행에서 계좌의 잔액증명서를 의뢰해놓고 고객들을 위해 켜 놓는 농협TV화면에 눈을 고정시켜 놓고 있다가 화면에 빠질 뻔했다. 수학여행을 떠난 학생들과 선생님,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친구들과의 추억을 실은 사람들, 꽃 같은 사람들을 실은 배는 서서히 바다로 들고 있었다. 내 인생에 단 한 번뿐인 결혼기념일은 늘 아쉬움과 눈물이 함께다.
 
2. 4월 23일
 전주 이씨인 엄마와 경주 김씨인 아빠는 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택시를 빌려 남해대교에 신혼여행을 다녀오는 것으로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홀시부였다. 어린 자식이 다섯이나 되어 새장가도 못 들고 혼자 키워냈다니 정말 대단한 양반이다. 


 술도가에 다니며 일찍이 막걸리 소믈리에에다 며느리를 위한 마음은 남편보다 더 나았단 이야긴 엄마가 하셨다. 보름달처럼 부푼 배를 내밀고 아이를 낳기 전까지 이웃집 날품을 다니고, 발이 푹푹 빠지는 갯논에 모를 심으러 다녔던 동네 아낙네들, 그 시절엔 그랬다. 


 며느리의 태기가 보이면 시장 가서 풋사과를 사오고, 이웃에 일도 못 도와주게 하고, 대형버스를 대절해 방방곡곡으로 2박3일 관광 다니던 시절, 아장아장 걷는 언니와 나를 걱정말고 관광 보내던 할아버지. 손끝이 야무져 한복바지 데님 매무새며, 우리들의 기저귀까지 네 귀가 딱 맞게 정리하신 깔끔 대마왕. 연달아 딸을 둘 낳은 엄마는 아들을 낳지 못한 죄로 할아버지의 눈총도 받았으나, 내 밑으로 남동생이 태어나면서 할아버지는 유독 나를 무릎에 앉히고 예뻐하셨단다. 고추밭에 터를 잘 팔았다고. 


 "엄마, 아이 성별은 남자가 결정하는데, XY염색체, 고등교육 받은 아빠는 왜 아무 말도 못했을까." "우리 때는 오~데 어른한테 말대꾸를 해여, 너그들은 참 좋은 세상에서 산다." 할아버지는 건강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시기 전날 목욕재계하시고, 손톱과 발톱을 깎고, 면도를 하고, 새옷으로 갈아입고 자는 잠에 홀연히 먼 길 소풍을 떠나셨다. 할아버지 제사가 다음 주다.
 
3. 입덧은 숙취?
 나는 결혼 후 5년 만에 아이를 품에 안았다. 배부른 여자만 봐도 부러워하고 질투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보다 늦게 결혼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대학시절 나와 함께 객지에서 자취를 하고 둘 다 흙수저인 우리는 단칸방을 구해 고향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반반씩 월세를 충당했다. 가난이 지켜준 우정이었다. 요즘 입덧이 너무 심해 밥을 못 먹으니 와서 떡국 좀 끓여 달라는 거다. 속으론 `이 가수나가 눈치가 없나` 싶었지만 대인배인냥 두 시간 거리를 버스를 타고 가서 떡국을 해다 바쳤다. 며칠 전부터 먹고 싶었는데 냄새때문에 냉장고도 못 열고 음식을 만들지 못해 참다 참다 내게 연락했다는 거다. 


 "문디가수나, 눈 짝짝이 낳을래. 묵고 싶은 건 무야지." "미안해서 그렇제." 입덧이라더만 한 그릇 다 먹는 친구가 대견하고 고마웠다. "근데 입덧은 우뜬 느낌이고? 드라마에서는 욱욱~하면 임신이더만." "입덧, 이기 참 설명하기 어려븐데. 참, 니 술 많이 마시고, 다음날 술 안 깨면 속이 울렁거리제. 딱 그 느낌이다." 아이는 늦게 주셨지만 내게 입덧은 없었다. 배추김치, 갓김치, 열무김치, 깍두기, 알타리무김치. 숙취처럼 속이 울렁거리면 나는 정각에 퇴근해 집에서 김치랑 밥을 먹고, 입덧을 다스렸다. 
 
4. 4월 28일 
 세상의 모든 신에게 기도해 낳은 첫아이는 딸, 송은찬이다. 아이는 `햇살이`라는 태명으로 자궁 속에서 근종과 함께 자랐다. 아이를 품고 낳을 때까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출산은 대성공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안으니 바스라질 것같이 아이가 정말 작았다. 태동과 탄생까지가 기적 같았던 나의 아이는 백일의 기적은 필요없는 순둥이었다. 


 딸의 이름도 태명에 이어 `반짝이는 삶을 살으라`는 뜻으로 우리 부부가 손수 지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니 은찬이라는 남자학생들이 두 명 있더란다. "엄마, 그 오빠들 부모님들은 남자에게 왜 여자 이름을 지어주었을까요?" "글쎄, 남자든 여자든 반짝이면서 살으라고 지은 이름 아닐까? 남자 이름 여자 이름이 어딧노."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시작하는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가 아니더라도 4월은 좀 잔인하다라고 생각했는데, 은찬이가 4월의 잔인함을 깡그리 없애준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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