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定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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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定命)
  • 남해타임즈
  • 승인 2021.05.07 14:17
  • 호수 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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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도(남해향교 전교)

인간의 수명은 정해져 있는가?
얼마를 살아야 오래 살았다고 하는가? 평균수명이란 이름으로 인간의 삶을 논하지만 보통 사주팔자(四柱八字)에 의해 정해져 있다고들 한다. 다시 말해서 날 때부터 타고 났다는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운명(fate)에 의하여 길흉·화복 등이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초인간적인 위력에 지배된다는 생각 때문에 순응하면서 살아간다.
아주아주 오래된 이야기지만 전남 해남군 대흥사에서 왔다는 노(老) 탁발승(托鉢僧)이 저의 집에 들른 적이 있었다. 어머님께서는 너무나 가난했던 형편이라 공양미는 못 드리고 보리밥이지만 양해를 구하고 점심을 접대한 기억이 난다.
식사 후 큰아들인 나에 대한 운수를 봐준다면서 사주(四柱)를 부탁했다. 노스님은 1시간여의 고민 끝에 2~3년 단위의 운수를 기록한 한 권의 공책을 주기에 그냥 받아보면서 크게 감동을 받거나 신뢰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서재의 한구석에 꽂아두고는 잊어버린 채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책장을 정리하다가 운수첩을 발견하고 지나간 시간들을 비교해 보니 맞는 것도 있고, 전혀 엉뚱한 내용도 있었다.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면서도 제일 마지막에 적힌 곳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73세 정명(定命)이라는 낱말이 거슬렸다. 당시 환갑을 하는 경우도 드물었기 때문에 고희(古稀)를 넘긴다는 것은 상당히 오래 사는 것이지만 그냥 예사롭게 넘겨버리고 잊고 살았다. 퇴직(62세)을 하고도 10년 이상 남았지만 72세가 되니 또 `73세 정명`이란 단어가 떠올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때마침 모단체에서 해남 대흥사로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동행하였다. 그 당시의 스님은 이 세상에 없겠지만 간 김에 사찰을 둘러보다가 명부전(冥府殿)에서 기도를 올렸다. 생명이 1년밖에 남지 않았기에 10년 연장을 부탁하는 기도를 정성스럽게 드렸다.
그런데 자주 만나는 지인이 지나다가 "뭣 하느냐"고 묻기에 거짓말을 할 수 없어 부끄러운 생명 연장의 사연을 말하고 말았다. 지인은 크게 웃었고, 술을 마실 때마다 오래 사는 비결에 대한 안주(按酒 ; a side dish)가 되어 버렸다.
이 사실을 지역신문에 수필로 발표했는데 군내 K암자에 있는 중학교 동기인 P스님이 이 글을 읽고 "내게 왔으면 20년은 연장해 주었을 것"이라는 농담에 또 한 번 웃으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시간과 세월은 말없이 흘러 또 다시 80세를 넘기고 보니 나의 뇌리에는 항상 종명(終命)의 압박 속에서 걱정을 하면서 살고 있다.
83세의 어느 날 약간의 사고로 2~3일간의 고통을 겪으면서 참으로 욕심도 많다는 것을 느꼈다. 73세, 83세를 넘기고 다시 93세, 103세까지의 생명 연장 욕심을 부린다면 주변의 어떤 사람도 동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과욕(過慾)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기에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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