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지고 묻힌 곳, 남해 충렬사에 관심을···"
상태바
"별이 지고 묻힌 곳, 남해 충렬사에 관심을···"
  • 김희준 기자
  • 승인 2021.05.14 10:46
  • 호수 7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예스러움은 좋으나 통영 충렬사와 비교하면 왠지 쓸쓸
더 많은 발길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 필요
짙어진 녹음 사이로 이어진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충렬사 외삼문이 방문객을 맞는다. 예스러움을 그대로 간직한 내·외삼문 주위로 풍파를 이겨온 담장이 성곽을 연상시킨다.
짙어진 녹음 사이로 이어진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충렬사 외삼문이 방문객을 맞는다. 예스러움을 그대로 간직한 내·외삼문 주위로 풍파를 이겨온 담장이 성곽을 연상시킨다.

 전 국토가 혼란에 빠지고 추정치로 사십만이 넘는 인구가 사망한 조선시대 임진왜란, 그 시기는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 전쟁으로 인한 궁핍과 불안, 피로가 전국을 지배했을 것이다. 역사가들이 말하듯 선조의 무능함 때문이었을까? 칼날 아래 기아와 질병, 죽음의 공포를 안고 연명하던 백성의 고통을 매듭지은 분이 이순신 장군이었음을 모르는 이 없을 것이다.
 
 그런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 476주년을 맞아 장군이 순국한 노량해전의 유적이자 전사 후 3개월간 임시 매장됐던 가묘가 남아있는 충렬사(사단법인, 사적 제233호)를 찾아가 봤다. 설천면의 노량회센터 주변 야트막한 산자락 기슭에 위치한 충렬사는 의외로 소박한 모습이었다.
자암 김구 비, 이태상 비를 지나 우측 청해루를 뒤로, 가파른 계단 위 외삼문이 세월과 비바람을 맞아 고된 모습으로 충무공의 사당을 지키고 섰다. 돌담과 기와는 낡았지만 5월을 맞이한 덩굴과 잡초는 초록이 무성하여 보는 이를 더욱 쓸쓸하게 만드는 듯했다.
 
 내·외삼문의 기와에서는 남해 바닷바람의 흔적을 볼 수 있었고 비석들은 경내외 곳곳에 흩어져 있다. 시멘트로 보수한 가묘 가장자리는 들떠 있고 비각을 받치고 있는 기둥은 불안한 초석 위에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다. 찾아보니 이곳은 애초에 남해 유림 두 분이 충무공 순국한 지 35년 되는 해에 자비로 초가를 지어 충무공을 기린 것에 유래하여 긴 세월을 재건과 철폐, 중건과 보존을 이어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니까, 지금의 모습이 충렬사로서는 최고의 모습인 것이다. 이충무공의 유해가 머물렀고, 순국한 노량 앞바다를 내려다보는 곳에 남해인이 처음 지었다는 점, 이충무공의 후손들과 남해인이 보존을 위해 애쓴 역사를 돌아보면 남해 충렬사는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지만 눈에 보이는 지금의 모습은 기대가 컸던 까닭일까,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반면 몇 해 전의 방문이긴 하지만 통영의 충렬사는 넓은 면적에 전시관을 포함한 부속건물도 많았고 특히 내삼문 앞으로 깃발들이 양측에 도열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에서 위풍당당함도 느낄 수 있었다. 순국 당시인 선조 39년에 왕명으로 처음 세워졌으니 세월에 씻긴 지는 더 오래 됐지만 부속건물과 건물의 상태에서 양쪽을 비교하기가 무색했다.
하지만 이날 만난 문화관광해설사 정아무개 씨는 "안전을 위해 좁은 길을 넓히고 제례 시에만 개방하던 중앙문도 방문객이 많을 때는 개방해 주의하고 있다"며 "주말에 학생들이 많이 오는데, 1980년 복원한 거북선이 특히 인기있다"고 말해 향토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다소의 실망감을 뒤로하고 본당을 들여다보니 방명록에는 다양한 지역에서 이곳을 다녀간 학생들의 이충무공을 향한 애정과 감사의 마음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천원, 이천원씩 헌금목록에 적힌 내역은 아마도 부모님이 손에 쥐어줬을 용돈 일부였겠거니 하며 한 장을 넘기니 "감사합니다"가 대신 적힌 것도 많다. 그들에게는 담장 아래로 보이는 잡초보다도 훨씬 위대한 무언가가 먼저 보였으리라. 잠시나마 규모와 상태에 실망감을 가졌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키 낮은 문을 지나 후원에는 이충무공의 유해가 3개월간 모셔졌던 가묘가 자리하고 있다. 바로 이곳에 잠시라도 계셨구나 생각하니 머리가 절로 숙여진다.
짧은 탐방을 마치고 뒤돌아 나오는 길에 낮은 담장 너머로 남해대교와 노량 바다가 멀리 보이는데, 다시 보니 덩굴들은 오랜 세월을 버틴 그 담장을 안아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끼 긴 돌계단과 판석 사이로 올라온 잡초가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이 고즈넉하니 애잔해 마음도 차분해진다.
이순신 장군의 유해를 모셨던 노량 충렬사는 남해의 관문에 위치한 우리 고장의 보물이자 자랑이다. 이 아름다운 곳에, 더 많은 이들의 발길이 머물 수 있도록 지역사회의 관심이 절실해 보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