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에서 생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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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에서 생긴 일
  • 남해타임즈
  • 승인 2021.05.28 14:14
  • 호수 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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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광장 │ 이현숙 본지 칼럼니스트
이현숙 │ 본지 칼럼니스트
이현숙 │ 본지 칼럼니스트

여기서 놀이터란 그네·시소·미끄럼틀·철봉이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이 아니다. 땀과 추억이 서린 우리 밭 이야기다.
책상에만 앉아 있으면 근육이 쇠퇴할 것 같아 놀이 겸 운동 삼아 밭을 장만한 지 이러구러 여덟 해다. 그런데 몇 해 묵힌 밭에서 엉망으로 자란 잡초 정글 탓에 시작부터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설 순 없는 지라 남편을 보좌하여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불굴의 정신으로 잡초와의 한판 승부를 벌였다. 마침내 산발한 여인에서 까까머리 소년으로 밭 모양새를 싹 바꿔 놓았다.
고생도 끝이다 싶어 달뜬 기분으로 밭 전체에 메주콩과 팥 종자를 심었다. 애초에는 욕심 안 부리고 채소나 몇 가지 자급자족할 요량이었지만 판이 커졌다. 이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날 일만 남았다, 얼마쯤 시간이 흐르자 오매불망 기다리던 새순이 흙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런데 이게 뭔 일이고! 눈앞에서 잡초가 푸릇푸릇 부활하고 있었다. 잡초 뒤치다꺼리에 코가 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밭일에 대한 환상은 깨지고 말았다.
하, 사람이 심은 농작물이 1이면 자연이 심은 잡초는 항상 그 몇 배다. 그날로부터 오늘까지 잡초와의 전면전을 치르느라 밭에 가면 한가롭게 노닐 여유가 없다. 그렇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잡초는 인간의 스승이다. 예쁨 받기는커녕 뽑히고 잘리고 짓밟힐 때마다 보란 듯 다시 일어서는 끈질긴 생명력을 통해 삶의 경건함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밭을 마련한 이듬해 식목일, 기념식수 차원에서 묘목을 심고 그 뒤로 몇 차례 더 심었다. 개중에는 꽃도 피워 보지 못하고 죽은 놈도 있고 그새 튼실하게 자라 터줏대감이 된 놈도 있다.  그리고 밭 지킴이를 자처하는 애들 가운데 `공유 지분`이라도 주장하듯 위세를 부리는 녀석이 있다. 밭 한편에 모아 둔 음식물 쓰레기를 먹으며 아예 붙박이가 된 까마귀다. 전봇대 위에 있다가 음식물 쓰레기를 쏟고 뒤돌아서는 순간 우르르 덤벼든다.
그게 마음에 걸려 생선이나 고기를 손질할 때 가시나 뼈에 살점을 제법 붙여 둔다. 걔들 뱃구레가 커봤자 얼마나 크다고 내가 한입 덜 먹지 싶어서다. 하등동물인 새와 고등동물인 인간 사이에 일말의 정이 싹텄는지 나를 보면 반갑다고 한바탕 재롱 잔치를 벌인다. 한 놈이 솔로로 선창하면 점차 듀엣, 트리오, 콰르텟으로 이어지는데 노래 실력은 별로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자기한테 관심을 가져 주면 저리 좋아라 한다. 그 밖에 두더지는 밭주인인 우리와 거의 동급, 멧돼지는 단골손님, 노루와 길고양이는 어쩌다 들르는 손님이다.
아무튼 그날, 이웃 밭주인에게 선물할 고구마 상자를 밭 한구석에 놔둔 채 정신없이 일하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가 보았다. 어럽쇼, 상자 위까지 수북했던 고구마가 밑으로 푹 꺼졌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잠시 후 밭에 나오신 어르신에게 괴담을 들려 드리자 "까마귀 짓이야. 우리 집에도 까마귀가 와서 다 물어 가."라며 대수롭지 않은 듯 여기셨다.
밭일을 마치고 고구마 상자를 댁까지 들어다 드리려고 함께 걸어 내려오는데 으깨진 생고구마가 길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고구마에 이름표를 붙여 놓은 건 아니지만 우리 고구마가 틀림없다.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던 차에, 놈들이 뻔질나게 물어다가 되새김질한 증거물을 압수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이걸 국과수에 넘겨? 말아?
옆에서 어르신이 "참말이네!" 하신 걸로 봐서 아마도 내 신용 등급은 한 단계 오를 듯하다. 어쨌거나 놈들 소행이 괘씸하여 앞으로는 생선 가시건 닭 뼈건 간에 한 번 더 훑어 먹고 버리리라 작정했다. 그러나 `까막 고기`라도 먹은 듯 어느새 `고구마 습격사건` 따위는 새까맣게 잊고 평소대로 내놓는다. 그러면 녀석들이 아주 흥이 올라서 기세 좋게 연신 물어 나르며 고맙다고 깍깍댄다. 살다 살다 까마귀한테 인사를 다 받아 본다.
올 봄도 어찌 그리 잊질 못하고 여기저기서 새 생명이 툭툭 불거졌다. 자연이 볼수록 경이롭다. 사람들이 투기 삼아 땅을 사 놓고 마음 졸이고, 땅값이 몇 배로 뛰었다며 또 자랑들을 한다. 그래봤자 자연의 솜씨에는 턱도 없다. 들깨를 심었더니 한 알 당 수백 배의 알을 낳았거든. 무엇보다 이삼일만 안 들여다봐도 보고 싶고 궁금해지니 어느새 `밭 중독`이 된 것 같다. 아무튼 나는 남편과 놀이터를 돌보며 뱃속 편히 살란다. 땅은 됐고 흙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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