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모 심는 처녀농사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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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모 심는 처녀농사꾼
  • 남해타임즈
  • 승인 2021.05.28 14:24
  • 호수 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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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의 남해일기

변화하는 계절이 여름 언저리에 닿으면 활짝 열어놓은 베란다의 큰 창문을 통해 부드러운 바람과 개구리들의 합창소리가 넘어 들어온다.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나 앰뷸런스가 다급하게 울리는 소리와는 사뭇 다르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에도 들리지 않던 개구리의 노랫소리는 논에 물이 찰랑일 때 가장 최고조로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아, 모심을 때가 되었구나."라고 혼잣소리를 한다.

나는 일찍부터 논을 놀이터삼아 자랐고, 초등학교 6학년일 때 이미 성인키로 훌쩍  웃자란 아이였다. 엄마는 디스크 수술을 한 환자였고, 연년생인 언니는 나보다 한뼘은 더 작고 흙을 무서워했고, 무엇보다 아빠에게는 말귀 잘 알아듣고, 힘 쎄고, 농삿일에도 가장 손발이 척척 맞는 아이였다. 우리 부모님은 농사가 주업은 아니었으나 농부만큼 공들여서 농사를 지었다. 특히, 매 끼니 쌀밥으로 주식을 삼는 우리 식구들이 먹을 쌀을 키워내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씨나락은 약물에 소독하고, 산기슭에서 퍼온 황토는 큰 체에 받쳐 고운 흙으로만 골라낸 다음, 모판에 고운 황토를 깔고 소독한 씨나락을 솔솔 뿌리고, 다시 황토로 아주 살살 덮어 켜켜이 쌓은 모판을 비닐로 감싼 다음 움을 틔웠다. 움이 튼 모판은 다시 논의 한 귀퉁이에 정렬로 고루 놓아 모가 자라길 기다렸다.

비닐하우스로 만든 못자리에 모가 얼추 자랐다 싶으면 기온도 따뜻해져 비닐을 걷어 바람과 햇볕을 쏘이게 했다. 마늘종을 뽑아낸 마늘이 줄기와 잎이 두세 줄기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낼 때 마늘캐기 딱이었다. 캐낸 마늘을 흙만 털어 마늘 두둑에 그대로 말렸다. 가슬가슬한 소리를 내는 마늘을 거둬들이고 나면 때마침 내린 빗물로 물을 가두거나 농업용 소류지에서 받은 물로 모내기용 무논을 만들어 찰방찰방 물이 고루 잠기면 무논의 모내기가 시작된다. 식구들이 많이 모이는 휴일을 잡아 온 식구가 출동하거나 품앗이로 농사를 지었다.

내가 어릴 땐 `손모`를 심었는데, 아빠와 나의 환상의 복식조가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쪄낸 모는 잘 보관해둔 짚으로 묶고, 그걸 논 언덕까지 올렸다가 모를 심어야 하는 다른 논까지 리어카에 담아 날랐다. 논의 구석에 별도로 마련한 못자리는 논과 도로사이에 큰 하천이 있어 일일이 나르기에는 시간이 걸리니 나는 논언덕에서 모를 던지고, 아빠는 건넌편 도로에서 내가 던진 모를 받아 리어카에 차곡차곡 포개어 담았다. 한창 손발이 척척 맞았는데, 잠깐 날아온 날파리가 코를 간질여 모 던지기가 한 템포 늦었다. 반대편 리어카에 모를 손보던 아버지가 앗!소리를 낸 건 그때였다. 내가 던진 모는 아빠의 손이 아니라 아빠의 머리 위를 명중시키고 말았다. 내가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너를 배구부에 넣을 게 아니라, 야구를 시킬 걸 그랬다. 스트라이크네." 마주 보고 웃으니 죄송하고, 무안하던 마음이 사라졌다.

〈남해읍 토촌마을 논 풍경〉 사진제공 이종원 / 여행작가

빨강실이 일정한 간격으로 달린 못줄은 논두렁 양쪽 끝에서 두 사람이 한쪽씩 잡고, 모를 심는 사람은 논바닥에 서서 예닐곱 포기씩 떼 내어 빨강실 앞에다 땅에다 눌러 심고, 다 심었다 싶으면 못줄꾼은 "자~"를 반대편 논두렁까지 들리게 외치며 다음 줄로 넘어가는 손 모심기. 논흙은 거칠었지만, 엄마같은 사랑을 주며 어린 모가 땅심이 생길 때까지 잘 품어주었다. 모내기가 한창일 땐 찰토마토까지 붉게 익어 새참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스뎅그릇에 토마토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설탕을 솔솔 뿌려 섞어 걸어오는 동안 그릇 속에서 잘 녹아 마지막 국물까지 마시고 나면 일꾼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던 시절이었다.

기계화농업으로 변화된 요즘, 농사철이 되면 황토를 고르는 단계 생략, 못자리 논남겨두기 취소, 엄마는 손가락으로 농사를 짓는다.
"초롱이 나배, 내 모판은 오십개 해주게."
"초롱이 나배, 우리집꺼는 온제 약을 칠랑고."
"초롱이 나배, 논 간기랑 모판이랑 모 심은거 올맨고."
기계화되어도 사람 손이 꼭 필요한 일들은 남아있기 마련이고, 엄마가 이웃집 아재 초롱이 나배를 하도 불러대니 농번기엔 장성한 남동생은 이웃 아재의 조수 노릇을 한다.

눈 깜짝할 새 일을 한다고 해 `도깨비 뜰`이라 불리는 버리들, 경지정리가 되어 바둑판처럼 정돈된 장평 뜰이나 계단식 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다랑논들의 마늘캐기와 모내기가 한창이다. 고령화가 가속화되는 남해라서 묵혀둔 농지도 있지만, 햇볕으로 빛나는 무논에 푸른 모가 자랄 때 이밥 한 그릇 먹은 냥 마음도 가득 찬다.

주말농장이나 체험농장을 가지 않아도 농산물의 경이로운 탄생과정을 보고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우리가 먹을 먹거리를 재배하고, 씨앗을 잘 보관하고, 종자를 연구하는 일,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오늘은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다. 올해는 풍년 농사가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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