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라린 과거의 괴로움을 소통과 몰입으로 이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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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라린 과거의 괴로움을 소통과 몰입으로 이겨내
  • 김희준 기자
  • 승인 2021.06.04 10:06
  • 호수 7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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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할머니가 사는 법 | 남면 평산1리 김옥순 할머니

생활지도사 돌봄서비스 도움받아 컬러링북으로 우울증 예방
김 할머니 "넘치는 배움의 열정, 뒤늦게라도 꽃 피우고 싶어"
남면 평산1리에 사는 김옥순 할머니. 김 할머니는 40여년 간 매일 일기를 써오고 있다.
남면 평산1리에 사는 김옥순 할머니. 김 할머니는 40여년 간 매일 일기를 써오고 있다.
김 할머니가 완성한 컬러링북. 매끈하게 색을 입힌 것이 완성도가 높아 보인다.
김 할머니가 완성한 컬러링북. 매끈하게 색을 입힌 것이 완성도가 높아 보인다.

 낙지와 도다리, 감성돔 등이 주로 잡히는 남면의 자그마한 어항이자 봄이 오면 해질녘의 아름다움을 즐기려는 관광객과 일몰을 화폭에 담아가려 화가들이 모여드는 평산항을 끼고 있는 평산1리, 우리 이웃 이야기를 제보받아 평산에서 꽃보다 아름다운 김옥순 할머니(80세)를 만나고 왔다.


 김옥순 할머니는 고향 제주도를 떠나 부산을 거쳐 1981년 남해 평산으로 정착해왔다. 결혼하면서 부산에서 먼저 터를 잡았지만 당시 아직 어렸던 큰 아들이 교통사고로 6개월여간 사경을 헤매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일이 도시생활을 버리고 남해에 정착하게 만든 계기였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남해에서의 생활도 순탄치 않아 평산에서 배운 `물질`을 하며 해녀로 살아가던 중 허리를 심하게 다쳐 오랜 기간 몸져 누웠다가 일을 그만둬야 하기도 했다고. 세 자식들이 모두 타지로 나가고, 남편과도 사별한 이후에는 수시로 찾아오는 우울함을 떨쳐내기 힘들었다고 한다.
 
삶의 고통 잊으려 색연필로 채색하는데 열중
 김 할머니가 일상으로 돌아오는데 큰 도움이 됐던 것은 이웃 주민의 관심과 지역의 돌봄서비스 프로그램이었다. 전담 생활지도사로 평산에서 20여분의 고령인을 돌보는 탁정례 씨는 "처음 만난 날부터 마음을 활짝 열고 많은 이야기를 해 주신 게 서로 큰 도움이 됐다. 지금은 엄마라고 불러요"라며 김 할머니와 같이 홀로된 고령자들에게 소통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화방남해통합지원센터(대표 김두식, 이하 화방지원센터)가 고령자를 대상으로 우울증을 예방하고 인지활동을 진작하기 위해 독려하고 있는 컬러링북 서비스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컬러링북은 책 속의 미리 인쇄된 여러 도안 위에 직접 다양한 색을 칠해 책을 완성하는 것으로, 최근에는 아이들뿐 아니라 일상에 지친 어른들도 힐링 수단으로 애용하고 있다. 


 김 할머니는 화방지원센터가 제공하는 컬러링북을 모두 완성하고 지난달 21일 전담 생활지원사와 조촐하게 책걸이 파티를 가졌다. 김 할머니가 완성한 컬러링북은 초급부터 고급까지 다양하고 복잡한 문양과 그림들이 가득했는데, 삐뚤빼뚤한 곳 없이 매끈하게 색을 입힌 것이 얼마나 집중해서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김 할머니는 탁정례(왼쪽) 생활지도사, 한경오(오른쪽) 사회복지사의 도움으로 의미있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김 할머니는 탁정례(왼쪽) 생활지도사, 한경오(오른쪽) 사회복지사의 도움으로 의미있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언젠가는 내가 쓴 글로
  책을 엮어보면 좋겠다"

 김 할머니는 "홀로 적적할 때면 과거의 힘들었던 일들이 떠올라 괴로웠지만 컬러링북을 하면서는 시간 가는 줄 모른다"며 "때때로 텃밭에 나가 일을 보거나 집안일을 하다가도 책을 잡으면 나중에 자식들 보여주려고 더 열심히 하게 된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지난 2006년 `찾아가는 한글교육 글짓기대회`에서는 살아온 이야기를 주제로 쓴 글이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지금도 뭐든 배우고 싶고, 공부하고 싶다"는 할머니의 학구열이 대단하다. 


 남해로 들어온 이후 40여년 간 매일 써왔다는 일기장에는 삶의 굴곡이 한 자 한 자 빼곡히 차 있다. 자식 키우고, 밥 굶기지 않으려 일하면서 꾹꾹 눌러놓은 배움에 대한 열망을 글로, 그림으로, 노인대학 활동으로 해소하고 있는 것이다. 김 할머니는 언젠가 당신이 쓴 글을 책으로 엮고 싶다고 했다.


 꽃을 좋아한다는 김 할머니가 평산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앞마당에 심어놓은 수국보다도 활짝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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