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태기의 전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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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태기의 전설 1
  • 남해타임즈
  • 승인 2021.06.04 10:34
  • 호수 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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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 나의 삶 91 │ 碧松 감충효
碧松 감충효 시인 / 칼럼니스트
碧松 감충효
시인 / 칼럼니스트

골태기 참 촌스런 이름이고 투박함이
생긴 것 그대로라 친근감이 가는 이름
낚시의 손맛으로는 최고 인기 골태기

 
 골태기라는 물고기는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니기 이전부터 인식해 적어도 고등학교에 다닐 때인 60년대 말까지는 필자가 살았던 마을의 봉천에 살았던 것 같다. 이 봉천이라는 큰 하천은 읍내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망운산이란 높고 큰 산에서 발원해 읍내의 남쪽을 휘돌아 내리다가 마지막으로 대나무 숲과 노송으로 둘러싸인 죽산(대뫼)마을을 다시 한번 껴안고 마을 앞의 하마정 들과 동쪽의 파천 들을 촉촉이 적셔 주면서 그 많은 수량을 강진바다에 풀어 놓는데 이 바다에 면한 봉내는 온갖 수초와 수생 어류 곤충의 낙원이었다. 


 이 읍성 주변에 위치한 죽산 마을의 대숲과 송림 사이에는 조선 숙종 조 후궁 장희빈의 소생 왕자를 왕세자로 삼으려는 숙종의 처사에 반기를 들었다가 화를 입은 기사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를 온 소재 이이명 선생의 적소가 있던 곳이었고 그 후 임인옥사의 화를 또 입어 두 번째로 이곳으로 유배를 당할 때는 영의정의 신분이었다. 그 이전에 장숙의의 어머니 윤 씨와 조사석의 내연관계의 언사에 포문을 열었다가 숙종의 진노를 산 사건으로 먼저 유배를 당한 서포 김만중 선생은 이곳에서 국문학사의 금자탑인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서포만필』을 남겼는데 소재 이이명 선생은 사적으로는 서포 김만중 선생의 사위이기도 했다.


 서포선생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그해 소재 이이명 선생이 서포 선생의 적소에서 키우던 매화 두 그루를 죽산의 적소에 옮겨와 키우면서 지은 「매부」가 전해오고 습감재라는 서당을 여는 등 이 지방과 인근 고을에 끼친 그의 애민사상과 서포선생과의 매화 두 그루에 얽힌 인문학적 역사적 사실에 감동한 백성들이 그 당시거나 후이거나 또는 이 적소인 습감재 서당의 옛터에 고등학교와 중학교를 세울 때 상징적으로 매원을 조성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매원의 매향이 읍성의 향교와 망운산 상봉을 감돌아 봉내를 적시고 강진바다까지 흘러갔다. 그 우람한 매원이 이곳에 대학교가 들어서기 전 얼마까지도 존재했었지만 지금은 개발의 불도저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소재 이이명 선생은 임인옥사로 두 번 째 이곳에 유배를 와서 얼마 후 한성으로 압송되다가 노량진에서 사사 당하였고 그 후 죽산의 적소 부근에 봉천사라는 사당을 지어 200년 넘게 유지되어 이곳과 사천, 하동의 유림이 제사를 올렸으며 봉천사 묘정비도 세웠는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봉천사는 훼철되고 봉천사 묘정비만 이 마을 인근 봉강산 자락에 외롭게 서 있다가 얼마 전 죽산마을 앞에 건립된 남해유배문학관에 옮겨져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연을 담고 있는 이 봉천(봉내)은 읍내 사람들의 휴식처요 빨래터며 가물 때는 보를 막아 물을 끌어들여 논농사를 짓게 해주는 이 지방 농민들에게는 생명수와 같은 존재였다. 여름이면 읍내 아이들이 물놀이와 낚시로 더위를 식혔고 겨울이면 큼지막한 빙판에서하루 종일 얼음지치기와 팽이치기, 연날리기를 하는 등 사시사철 이 곳은 남녀노소를 불문한 삶의 큰 공간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곳의 진풍경은 천렵이 동반된 동네 사람들의 봄놀이 프로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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