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로남불` 창시자 … 촌철살인으로 정곡찌르는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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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로남불` 창시자 … 촌철살인으로 정곡찌르는 논평
  • 하혜경 서울주재기자 기자
  • 승인 2021.07.16 10:17
  • 호수 7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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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2년 안부묻기 인터뷰 첫 번째 | 박희태 전 국회의장
입법부 수장에서 물러나 친구들과 우정 나누는 일상 보내

 13대부터 18대까지 남해 하동, 양산시 국회의원 6선. 20년간 군민들의 선택을 받아 집권여당 대변인 4년, 법제사법위원장, 법무부장관, 한나라당 대표최고의원, 국회의장을 역임한 박희태 전 국회의장. 입법부 수장이었던 어깨의 짐을 내려놓고 이제는 고향 후배들의 든든한 선배로, 한 여자의 남편으로, 어릴 적 추억을 공유한 친구들의 벗으로 돌아온 박희태 전 국회의장을 만났다. 코로나로 고향 선·후배들의 만남이 줄어든 요즘 서울 향우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박 전 의장 안부와 정치 입문 후 30년 동안 정치사 뒷이야기를 전한다.
 
국회입성
아내의 `운명이다` 한마디에 결정

 이동면 정거리 양복점 집 아들로 태어난 박희태 전 의장 선친의 본가는 남면이었다. 남면에서 신시가지로 조정되던 이동면 정거리로 이사를 온 것은 박 의장이 태어나기 직전이었다.


 "선거 때는 표를 많이 얻어야 했으니까 `아마 남면에서 만들어져서 이동에서 태어난 것 같다`고 이야기하곤 했었다"는 박희태 의장. 그도 생계를 위해 삶의 터전을 옮겨 다녀야 했던 우리 부모님과 다르지 않은 유년을 보냈음을 말해준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그는 이동초와 남해중학교를 거쳐 부산으로 유학을 가서 경남고에 진학했다. 이후 엘리트 코스인 서울법대와 사법고시를 거쳐 검사로 승승장구했다.


 검사로 잘 나가던 그의 정치 입문 과정이 궁금했다. 그를 정치로 끌어들인 사람은 얼마 전 타계한 이한동 국회의원으로 알려져 있다. 1987년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 된 후 부산지검장을 거쳐 신설된 부산고검 초대 검사장을 역임하던 그를 서울대 선배였던 이한동(당시 민정당 원내총무)씨가 추천했던 것이다.


 "지금도 기억나지,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서울로 부르더라고, 4월 총선이 한 달도 안 남았는데 공천을 받으라는 거지. 나는 돈도 없고 조직도 없어 못한다고 했는데 당에서 다 지원해준다고 결정을 하라고 압박을 하는거야."


 제안을 받고 가족들과 밤새 가족회의를 했다. 20년 이상 몸담은 검찰조직을 떠나는 걸 단 하루만에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난 내심 검찰총장을 꿈꾸고 있었는데 만약 내가 지금 공천을 사양한다면 미운털이 박혀서 총장으로 승진하는 것도 어려워지고, 하루 아침에 꿈도 안 꿔본 정치를 하려니 참 난감했지. 그런데 그때 우리 집사람이 졸고 있던 내 어깨를 치며 `운명이다`라며 받아들이라고 하더라구. 결단력 있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때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 한마디가 결국 내 운명을 바꿨다."
 
최장기 집권여당 대변인 맡아
촌철살인

 아내의 조언으로 정치입문을 결심하고 집권여당의 공천을 받아 1988년 13대 국회에 입성했다. 그가 처음 맡은 역할은 국회법 정비였다.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았는데 당시 국회는 그냥 행정부의 거수기에 불과하던 시기라 국회가 제 역할을 하려면 법령정비가 급했다. 국회법 입법 소위원회에서 박상천 의원과 많이도 싸우면서 국회법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비교적 합리적이었던 박희태 초선 국회의원이 국회 출입 기사들의 눈에 띄기 시작했다. "당에서 대변인을 뽑는데 내 이름이 후보자에 들어가 있어. 당시 대변인은 적어도 재선 아니면 3선 정도 해야 맡을 수 있는 당직인데 초선인 내 이름이 있어서 이유를 물었더니 `기자실 추천`이라고 하더라."


 기자들 추천(?)을 받아 국회역사상 가장 긴 4년 1개월 여당 대변인을 맡게 됐다.


 "기자들이 잘 봐줘서 그렇지 뭐"라며 스스로 낮추지만 그 만큼 핵심을 찌르고 촌철살인을 구사하는 정치인은 그 전에도 후에도 없었다. 그의 입에서 탄생한 명언이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을 줄인 신사자성어다. 내로남불은 지난 4월 뉴욕타임즈에 한국총선결과를 전하는 뉴스에 `naeronambul`이라는 영어단어로 등장했을 정도다. 현실을 반영하는 일상적인 용어가 된 것이다. 
 
문부식 전 국회의원에게
세비 절반 지원

 집권여당 최장수 대변인은 이후 그의 정치생활에 큰 디딤돌이 됐다. 남해·하동지역구에서 내리 5선을 하고 양산에서 보궐선거로 당선해 지역구에서만 6선을 한 국회의원은 극히 드물다. 당내 입지도 탄탄해 당 원내총무와 대표최고의원, 국회의장까지 단숨에 달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인이란 4년마다 선거를 통해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만큼 사람과의 관계에서 호불호를 감내해야 하는 직업이다.


 부침이 심한 정치세계에서 그가 의리를 지킨 일화를 들려줬다. 9대 국회의원을 지낸 문부식 의원과의 인연이었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이 3당 야합을 하면서 당시 통일민주당 남해 하동 지역구위원장이던 문부식 씨가 직이 없어졌다. 이분은 다른 직업이 없었고 오직 정치만 하시던 분이었는데 도의적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직접 만난 자리에서 `우리가 당대당 통합을 했으니 선배님께 내가 받는 세비의 절반을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문부식 전 국회의원이 1996년 돌아가실 때까지 지켰다. "연로하신 선배가 정치가 아닌 다른 일을 했더라면 약속하지 않았을 것이다. 평생 정치인으로 살면서 9대 중대선거구제일 때 국회의원을 한 번 했던 분인데 당 통합으로 인해 일이 없어졌기 때문에 도와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남중 동기들과 만나
우정 나누는 일상 

 정치사의 수많은 일들이 그의 곁을 흘러 지나간 지금. 어떤 물결은 큰 상처를 내기도 했고 어떤 물결은 좋은 인연을 남기기도 했다. 정계를 은퇴한 요즘 그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내와 드라이브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침 일찍 추억이 깃든 장소로 드라이브를 가서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점심을 먹고 돌아온다. 오후는 함께 가벼운 운동을 하는데 얼마 전까지는 근육운동도 했는데 요즘은 그냥 걷는 유산소운동만 해."


 여섯 번의 총선거와 크고작은 당내 선거에서 정치인의 아내로 묵묵히 그 역할을 감당해 준 아내 김행자 여사의 건강이 좋지 않다. 아내와 하루를 시작하는 드라이브는 아내의 치료에도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박 의장 자신에게도 좋은 시간이라고 말한다.


 한 달에 두어번은 남해중학교 친구들의 모임인 `삼우회`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진다. 폭탄주 원조답게 여전히 한 자리에서 10여 잔의 폭탄주를 즐길 정도다.


 "우리 친구들이 다 술을 잘 하더라고. 거기선 내가 별로 술이 쎈 편이 아니다. 그래서 편하다"며 친구들의 건강과 우정을 에둘러 자랑하는 박 전 의장.


 더불어 후배들의 집안 대소사나 애경사도 꼭 챙긴다. 지난달 열린 김두관 더불어민주당 후보 출판기념회에도 직접 참석해 응원했다. 정당을 떠나 도전하는 후배라면 지지하고 격려해야 한다는 마음이었으리라. 박 전의장은 "이제는 후배들이 남해를 더 살기 좋은 곳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능력 있는 후배, 고향을 사랑하며 헌신하는 후배들이 자랑스럽고 고맙다"며 덕담으로 긴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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