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엔 삼선슬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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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엔 삼선슬리퍼
  • 남해타임즈
  • 승인 2021.08.05 11:06
  • 호수 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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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의 남해일기

 덥다 못해 찌는 더위가 계속되는 요즘이다. 끊이지 않고 오던 코로나19 관련 문자메시지보다 행정안전부의 폭염 심화에 따른 외출자제, 실외 폭염안전 수칙 안내가 더 많아졌다. 여름에 내리는 비는 그 추억이 많아 한낮의 시원한 소나기를 애써 기다리기도 하는데, 여름더위가 유난히 길다. 어릴 때는 비 내리는 날을 기다리기도 했다. 빨강색 함석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낮잠을 부르는 자장가이기도 했고,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지져내는 부침개는 빗소리를 닮은 맛있는 소리이기도 했다.
 
 나는 주소로는 읍내지만 성내에 살지 않아 학창시절엔 25분정도를 걸어다녔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면 우산은 필수였고, 전날 밤 비가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가 있으면 가져가기 싫어도 무조건 우산을 들고 학교에 가야 했다.
 
 아침에 햇빛이 쨍쨍한데 오후부터는 비소식이 있다고 엄마는 그날도 네남매에게 우산을 하나씩 챙겨주셨다. 이미 햇살이 맑은날이어서 들고가기 귀찮은 나는 우산을 안 가져갈 거라고 고집을 피우고 서 있으니 지각할새라 엄마는 빈손으로 나를 등교 시키며, "비 와도 우산 갖다 줄 사람 없다이" 뒤통수에 대고 한번 더 확인도장을 찍으신다. 여름풍경의 농촌은 비가 내려도 바쁘다. 빗물이 잠길 논에 물꼬는 잘 트였는지, 논두렁은 잘 긁어 올렸는지, 풀이 작물보다 빨리 자라 북치켜 올리기도 바빴다. 
 
 햇빛이 깨질 것 같은 하늘에 빠른 속도로 먹구름이 몰려오고 곧 장대비를 쏟아부었다. 새텀모 외따로 살던 나는 우산을 같이 쓰고 갈 동네 또래조차 없어 걱정이 한바가지였다. 비를 맞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엄마 말을 듣지 않아 혼날 것이 더 두려운 나는 걱정이 쏟아지는 빗물보다 많았다. 
 
 학교 정문을 나서자 `만우슈퍼(*현재, 남해초등학교 건너편 편의점)` 처마 밑에서 우산 마중을 나온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른 말을 들으모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안 쿠더나. 논물도 보고, 배토괭이로 논두렁도 올려야 되는데, 나락농사 망치몬 니는 밥 굶어라이."
 엄마의 지청구도 반가웠던 그 시절, 그때 떠내려가지 않은 모가 대풍을 이루어 내 살을 찌웠나보다.
 
 중학교 다닐 때는 비가 내리면 교실에서 신던 실내화를 신고 하교했다. 그땐 운동화 한 켤레가 전부였기에, 여름엔 젖은 신발을 말리기 어려웠다. 군불을 때는 겨울에는 아궁이 옆에 운동화를 줄 세워 말리고, 솥뚜껑 위에는 양말을 말리면 다음날 아침은 뽀송뽀송한 등굣길이 되었지만, 여름에는 어디 그러한가. 
 
 실내화는 모두 맞춘 듯이 `삼선슬리퍼`를 신었다. 오래 신으면 뒤꿈치가 닳고, 고무가 물러져 빗길을 걸을 때마다 뽀드득, 푸드득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길 위 물웅덩이를 폴짝 뛰어 건너다가 미끄러졌는데, 일어나니 슬리퍼 한 짝이 없어졌다. 돌아봐도 없고, 옆을 봐도 없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걸으려니 다리가 묵직하다. 이런, 이런, 늘어진 슬리퍼가 미끄러져 발가락이 다 나오다 못해 장딴지까지 올라간 것이 아니겠는가.
 "니 뚜꺼븐 장딴지에 신발이 끼아져여, 장난치나."
 "내가 중학교때부터 이 덩치였냐고."
 "아무리 그래도 니는 개콘에 나올 이야기를 해삿네."
 "아이고 참내. 내 꿈이 개그맨인지 모르나. 내가 사투리만 덜 썼어도 벌써 서울갔제. 서울말은 끝만 올리면 돼~ 함시로."
 
 여름이면 물옥잠화가 활짝 피었다. 사건이 있던 그날은 학교에서 물고기의 `부레`에 대해서 배웠다. 부레는 물고기의 뱃속에 있는 공기주머니로, 물고기가 떠오르고, 가라앉지 않고 일정한 깊이에 머물 수 있게 한다. 그런 부레의 원리와 같은 것이 물옥잠이다. 나는 물고기의 부레보다 예를 들어주신 물옥잠 꽃이 너무 예뻤다. 언니랑 골안(곡내) 빨래터를 지나는데 물옥잠이 그득 떠있는 것이 아닌가.
 
 "은니야, 물옥잠이다. 저그 한 개 좀 따주라."
 "빨래터 깊을낀데, 빠지몬 우짤라고."
 "은니 니가 하몬 안빠진다. 함 해봐라, 빠지몬 내가 어른들 불러오께."
 "가시나, 니는 밸걸 다 시키네."
 언니는 빨래터 옹벽을 잡고 한걸음씩 나아가 물옥잠을 하나 따서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은니야, 이거 너무 작다. 저~기에 있는 큰 거 한 개 따오모 안되나."
 "있어봐라."
 첫 시도에 성공한 언니는 다시 돌아가 큰 물옥잠을 하나 더 따오려다 빨래터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언니가, 물에… 언니가, 물에…"
 놀란 나는 문장을 완성 시키지도 못하고 고함만 질렀다. 이웃에 농사짓던 동네삼촌이 와서 언니를 건져냈다.
 그때도 언니는 분홍색 삼선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언니는 그날 이후로 물에 대한 트라우마로 여름이 되어도 수영장을 못 간다.
 "은니야. 남해유배문학관에 물옥잠 꽃이 한창이란다. 구경 갈래." 했다가 슬리퍼로 맞을  뻔했다. 언니,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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