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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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동 할아버지
  • 남해타임즈
  • 승인 2021.08.13 10:54
  • 호수 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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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의 남해일기

 `산할아버지 구름모자 썼네. 나비같이 훨훨 날아서 살금살금 다가가서 구름모자 벗겨오지. 이놈하고 물벼락 내리셨네. 천둥처럼 고함을 치시네. 너무 놀라 뒤로 자빠졌네. 하하하하 웃으시네`동그란 얼굴에 깔끔한 스포츠머리, 잘 다린 한복을 입고, 외출 땐 중절모를 쓰시던 할어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노래다.
 
 아들이 미취학 아동이었을때 어린이집에서 낮잠을 실컷 자고 오는 날이면, 엄마인 내 품에선 눈을 비비면서도 잠투정하기 일쑤였다. 하루 종일 서류에 치여, 전화에 치여, 사람에 치여 노곤한 몸을 눕히고 싶은 나는 `망태 할아버지`를 찾았다. 손톱을 세워 침대를 긁으며 "이기 무슨 소리고? 이비야~ 망태 할배가 잠 안 자는 애들 잡으러 온다" 하면 말귀 훤한 아들은 억지로 감은 눈이 파르르 떨리면서도 곧 잠이 들었다.  나도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어릴 적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망태 할아버지가 아이를 키울때는 때론 명약이기도 했다.
 
 동네엔 여러 할아버지들이 계셨다. 농사철이 아니라도 쉬지 않고 늘 둥저리를 메고 다니는 농사꾼 할배, 행정기관이나 군부대의 마크가 찍힌 모자를 늘 쓰고 다니는 할배, 먼지 한 톨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담긴 다림질한 바지를 입은 제복각 할배, 어린아이들을 보면 사죽을 못 쓰고 귀여워서 일단 안고보는 할배, 막걸리는 나의 힘 막걸리 소믈리에 우리 할배.
 
 우리 할배는 첫손주인 언니를 참말로 귀하고, 예쁘게 여겨 똥기저귀 빨래는 물론, 밤에 재우기, 낮엔 업어 키우기로 사랑을 베푸셨다. 그런 할배의 무한한 사랑을 먹고 자란 언니와 달리 나는 또 딸이어서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할배품을 구경도 못했다. 엄마 말에 의하면, "연갱이 니가 고추밭에 터를 잘 폴아서 2년뒤에 남동생이 태어나고 니 이름도 똑띠 부르게 됐다 아이가." 이 대목에서 내 이름에 대한 이야기.
 
 내 이름은 배구 좀 한다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김연경`이지만, 아들손주를 품에 안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큰 소원이었던 할배는 내가 태어나자 동네에서 작명 좀 한다는 집에서 `ㅇ자`라는 이름을 받아왔다. 놀랜? 엄마는 아빠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아빠는 옥편을 밤 새 뒤져 만들어 낸 이름 세 개중 하나가 오늘의 `연경`이다.
 이마저도 남동생이 나기 전까지 처방전인 `두례`라고 불리었다. "아버님, 연경이 남동생도 낳았으니 이제 민적이름을 부르지예." 요즘 MZ세대에게 개그소재로 쓰이고, 페미니스트들에게 공격의 소재가 될 내 이름 탄생사.
 
 요즘처럼 더운 한여름이면 야시 방맹이 언니가 "할아부지, 떱지예?" 하며 할배를 생각하는 척 하고, 마을구판장으로 막걸리 심부름을 갔다. 언니의 속마음은 구판장에서 파는 아이스께끼에 온 마음이 팔렸을 테지만 빈주전자를 달랑달랑 들고 가서 돌아 오는길에는 막걸리를 채운 주전자가 무거우니 반 치나 길에 흘리고 왔다. 나는 막걸리 심부름을 다니면서 할배는 왜 주전자를 그리 좋아하는가. 주전자를 기울이고 한 모금 마시니 그 맛이 쓰기도 하고, 달달하기도 하고, 어릴 적부터 막걸리에 입문하게 된 계기다.
 
 "너그 할아부지가 이적지 살아계셨으몬 너그들이 돈 벌어서 할아버지 막걸리도 많이 받아다주고 했을낀데. 그래도 그 시대엔 장수하싯다."
 "엄마, 할아부지 심부름은 내가 젤 많이 했제." 언니가 한마디하면
 "은니야, 니는 무겁고로 그 주전자를 그리 들고 오네. 내 긋치로 쪼매 묵어삐제. 머리가 나뿌모 손발이 고생이다."
 "할아부지가 주전자 들어보몬 아는데, 니는 하여튼 간이 크다. 그렁께 니가 술을 묵을줄 아는기라."
 하도 오래 되어서 할아버지 생각도 안하고 살았는데, 요즘 할아버지 같은 분을 만났다. 할배가 부르기엔 너무 젊은 오빠 같지만, 머리카락에 서리가 일찍 내렸다. 고구마 10개 먹고 체한 듯한 우리들에게 사이다 발언을 넘어 까스활명수 같은 말씀을 많이 하셔서 톡 쏘는 사이다를 좋아할 것 같지만, 주특기는 막걸리라신다. 트인 생각, 풍류를 아는 멋, 격 없이 편한 시간을 만든다. 함께 하는 사람을 모으는 그분만의 특별한 신호는 "띵~동"이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던가. 시간을 잊고 그 시간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다.
 
 끊임없이 운동해서 복근을 만드는 보디빌더 할배, 패스트푸드점에서 척척 주문해서 햄버거를 먹는 할배, 새로 출시된 스마트폰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얼리어답터 할배, 관절을 꺾어 브레이크 댄스를 추고, 빠른 발음으로 랩을 열창하는 할배들. 젊은이들의 전유물이었던 문화를 속속 받아들이고, 꼰대생활 즐기던 어르신들도 생각의 차이를 좁혀 슬기로운 노후생활을 영위하신다.
 
 오늘도 즐겁고, 행복할 권리. 우리 모두 "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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