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엄마들의 대학 졸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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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엄마들의 대학 졸업장
  • 남해타임즈
  • 승인 2021.08.30 11:22
  • 호수 7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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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의 남해일기

인구의 위기를 넘어 인구절벽 시대, 남해군은 1960년대 13만 명이 넘던 시절에서 이제는 인구 5만 명이 안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 부모님들이 100년도 더 넘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한 반에 70여 명이 빽빽이 들어 앉아 그것도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눠서 수업했다는 말씀을 하셨다. 내가 국민학교 다니던 때에도 한 학년에 4개반은 기본으로 한반에 50여 명 정도였으나, 요즘 아이들은 20여 명 정도가 학습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철모르는 시절에는 조부모와 부모님, 형제들까지 집안을 북적이게 하고, 서로 복닥거리며 살았다. 학교에 입학해서는 `가정환경조사서`를 작성했는데, 집에 같이 살고 있는 가족들과 집안에 갖추고 있는 가전제품까지 조사를 했다.
"엄마, 오늘 집에 세탁기 있는 사람 손을 들으라고 했는데, 나는 세탁기가 없어서 고만 책상에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어. 내가 살짝 보니깐 손든 친구들이 열 명도 안 되더라고." 언니가 말을 하면, "세탁기 없능기 믄 죄가. 내는 그런 거 암시랑토 안허다. 우리집만 없는 것도 아인데, 은니 니는 그렁기 뭐 부끄럽다고 그리삿네." 나는 철이 다 든 아이처럼 굴었다.

우리 집에 세탁기가 들어온 것은 내가 6학년 때였다. 엄마가 밭에서 딴 오이랑 부추랑 깻잎을 고무 다라이에 이고 읍내 시장에 팔러 갔는데, 그걸 다 팔고, 빈 다라이를 머리위에 이다가 허리를 삐끗했다. 그 길로 앉을 때도 누울 때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주변 사람들의 정보를 총 동원하여 엄마는 서울까지 가서 디스크 수술을 하고 돌아왔다.

몸빼바지 입고 시장에 날품장사까지 하며 생활력이 넘치던 엄마는 갑자기 사모님이 됐다. 가족들이 먹을 식사준비, 빨래, 엄마 머리감기기까지 아빠가 다 하셨다. 쌀을 씻어 밥물을 맞춰 밥을 안치는 방법, 쌀을 씻은 첫 번째 물은 버리고 두 번째 쌀뜨물을 받아 된장찌개를 끓이는 법, 새우젓을 넣고 계란찜을 만드는 방법 들을 엄마가 입으로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찍이 살림에 눈을 떠 요즘에도 어렵지 않게 식구들의 밥을 해낸다. 아빠가 퇴근하신 후 뒤따라 세탁기가 배달되어 왔다. 없을 때는 몰랐던 편함을 알아 우리는 빨래를 서로 하려고 다퉜다.

가정생활조사서에 꼭 들어가는 것 중 하나는 부모님의 학력을 적는 것이었다. 부, 고등학교 졸업, 모, 국민학교 졸업. 그걸 적을 때마다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내는 집에 큰기라꼬 개우 궁민학교 보내고, 딱 까막눈만 뱃기준기라."
"엄마, 엄마가 오데 가서 이야기 안하몬 엄마가 똑똑해서 국졸인거 아무도 모린다. 그러고 엄마 글씨 적는 거 보몬 사람들 놀래삘걸? 대학교 나온 사람보다 글씨가 더 좋다 아인가."
"내로 중학교 문턱이라도 넘고로 해조시몬 내가 이리 살았긋나. 옛날에 동네에 부녀회에서 구판장헐 때 외상장부가 있었는데, 그때 민지네 삼촌이 누우 글씨가 젤 좋다 캣다 아이가."
"하~ 엄마가 그때 중학교 갔으몬 이런 촌구석에 살았긋능가. 그리되몬 우리도 몬 태어났제."
그렇게 우리는 엄마를 자랑스럽게 치켜 세워주곤 했다.

그런데 내가 깜짝 놀란 건 친구들이 작성해 온 조사서였다. 아버지들은 초등학교 졸업 이나 중학교 졸업이 보통인데, 엄마들은 대학교 졸업이 간간이 있었다. 아버지들의 학력이 높고, 어머니들의 학력은 낮다는 생각을 가졌던 내 오랜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우와, 너그엄마 대학교 나왔나."
친구집에 가니 빨간 루즈를 칠하고, 학사모를 쓴 엄마의 사진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 사진이 오래된 것이 아니라 이상하여 한 번 더 보니 액자아래에 적혀져 있던 `화전주부대학 졸업기념`.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우리엄마를 `이화여대 졸업`정도로 적어놨어도 누가 확인할 것도 아니었는데, 아쉽다.
이 우스개 이야기는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오래된 동창회에서 상구 오래 지난 이야기를 하면서 박장대소한 소재다.

모두 갖춰 놓고 살면서도 1인 가족, 혼밥족, 혼술족, 혼여족이 늘어나고 있다. 가족들간의 이야기도 점점 줄어들고, 옛 기억을 살려 오랜 이야기를 하면서 꼰대소리를 듣는 나이가 되었다. 이야기가 넘쳐나던 시간과 사람들 사이에 정을 나누던 그리운 시간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100년이 지나도 남해군의 이야기는 화수분처럼 줄어들지 않고, 결코 사라지지 않을 남해군의 생존 분투기를 누군가는 계속 이어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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