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고사리밭길을 내려가면서 간간이 소나무 숲길을 지나면 어느새 가인마을 9㎞를 온 것이다. 잠시 휴식하면서 배달된 고사리나물 비빔밥으로 하는 식사는 행복호르몬을 상승시킨다. 여기서 인터넷 신청한 손님은 복귀를 하고 이어진 제2차의 6㎞ 길 적량까지 걸어간다. 천포마을까지 2㎞는 차도로 이어지므로 차량, 경운기를 주의하면서 걷는다. 천포마을은 바다가 협소하고 수심이 얕아서 여튼개라고 한다. 천포에서 계속 이어지는 산길은 한 두 곳을 제외하고는 완만한 길이요 매미와 새 합창단의 축하공연에 추임새로 어깨를 들썩이다 보면 지루하지는 않다.
풍경소리가 은은히 귓전을 맴도는 송암사를 지나 손에 잡힐 듯 통영 사량도 천왕봉, 칼바위, 옥녀봉을 가로지르는 등산객 발자국 소리 엿듣기를 한 시간가량, 종점인 적량마을이 정다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여기 적량은 장포와 대곡, 적량마을로 분동되어 115가구에 250여명이 거주하고 농칠어삼으로 30여척의 고기잡이배와 물건항과 더불어 요트 항으로 유명하며 바다에 의지하는 전형적인 농어촌마을이다. 적량마을의 역사적 흔적을 따라가면 고려 공민왕2년(1390) 적량만호가 설치되었고 조선 태종7년(1407)에 적량만호를 혁파하고 다시 세종1년(1418) 적량만호를 부활하면서 구도섬에 보(堡)를 설치하였다. 세조6년(1460)에는 대방산봉수대를, 성종21년(1480)에는 적량성을 증축하였다. 숙종14년(1688) 만호에서 첨사로 승격된 적도 있고 광무10년(1906)에 진주목에서 남해군으로 귀속되었다. 1931년 적량에서 장포가 분동되고, 1981년 대곡이 분동되었다. 적량은 양씨가 입동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동쪽 사량도 근처에서 해가 떠올라 성(城)에 반사되면 붉게 보인다 하여 적량(赤梁)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온다. 정유재란 시 미조항첨사, 평산만호가 참전하였고 적량만호 권 전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고 『이충무공전서』에 기록되어 있는 걸로 보아 민관군이 왜군에 맞서 투쟁하여 남해를 지켜낸 것으로 보여진다.
『진주목읍지』에 `적량은 주(州)의 서쪽 창선도 적량면에 있다. 주에서 1백10리(44㎞)인데 수군만호가 수어한다. 석성이며 둘레가 1182척(354.6m), 너비가 405척(121.5m), 길이가 407척, 전선(전투판옥선) 1척, 병선(전선호위용 무장선) 1척, 사후선(연락, 정찰선) 2척이다. 감관이 1명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순조 때 『만기요람』에 적량진의 군액(군인)은 전선능로군 145명, 사부 28명, 화포수 10명, 포수 34명 등 217명이 배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삼천포 대방진의 굴항과 버금가는 굴항이 있었는데 현재는 논으로 개간되어 활용되고 있다. 15㎞의 남해바래길 4번과 남파랑 37번은 걷기의 달인·고수들과 경험담을 나누고 삼천리금수강산의 절경 그리고 동해의 푸른 파도와 남해안의 `그 섬에 가고 싶다` 섬 공원들, 남파랑길, 산티아고의 순례길 그리고 남해의 잘 가꿔진 바래길을 철학적, 생태적 관점에서 토론하고 접근했던 4시간의 여행으로 큰 감동을 전해줬다.
우리 일행은 승리의 마음으로 바래길 안내간판 앞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고 택시를 불러 창선복지센터로 복귀하였고 필자는 말발굽길로 가는 제주 고수를 따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