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해준 밥이 최고로 맛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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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해준 밥이 최고로 맛있을 때
  • 남해타임즈
  • 승인 2021.10.01 10:30
  • 호수 76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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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하늘과 산의 능선들이 그려내는 선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때가 지금 절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는 가을 이 시간. 걷는 길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지역마다 고유의 이름을 붙인 길을 내고, 오래도록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 풀로 뒤덮인 옛길을 더듬더듬 찾아내고 복원시켜 사람들에게 선물처럼 내놓았다.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생태 녹색길, 남해바래길 등 산길을 걷고, 해안변을 따라 걷고, 성벽 위를 걷는가 하면, 자그락자그락 소리까지도 경쾌한 몽돌밭으로도 걷는다. 자연을 품고 마음을 정화시킬 수 있는 길이다. 함께 걸으며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들은 대자연에서 뿜어내는 좋은 에너지처럼 달콤하다. 적당한 땀과 참을 수 있는 목마름은 바쁜 일상의 틈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와 격려와 위안을 준다.
 
 업무를 하면서 외부도시가 고향인 청년이 남해의 아름다운 풍광에 반해 남해에 정착했다거나, `남해에서 살아보기` 프로그램을 통해 알게 된 남해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젊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남해의 마을마다 이어진 길과 마을의 골목과 골목이 너무 좋았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내놓았다. 담이 낮아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이고,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소리에도 나와서 안부를 여쭈던 다정다감한 시절은 지났다. 아이들이 삼팔선 놀이를 하고, 오징어게임하던 시절은 잊혀가고 있어도 골목은 그 시간과 추억을 품고 있는 듯하다. 
 
 주말에 가족들과 남면 평산리에 위치한 유구마을을 함께 걸었다. 바다를 보며 자라던 벼는 어느새 추수가 끝나가고, 키다리를 뽐내던 참깨도 빈병마다 고소함을 가득 채우는 가을이다. 밭마다 비료이거나 거름인 포대가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곧, 날카로운 낫으로 몸이 잘린 포대에서는 땅심을 위해 골고루 뿌려질 알갱이들이 신호탄처럼 고요히 대기하고 있다. 깨질 듯이 파란 바다와 청명한 가을하늘은 서로를 너무나도 사랑해 그 빛은 온전히 닮았지만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상사화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랴 이랴, 채찍질로 소를 길들이며 쟁기질로 밭을 갈던 시대는 이제는 옛일이고, 집채만한 트랙터가 씩씩하게 단숨에 밭을 간다. 포슬포슬하게 말라있던 땅을 긁어내니 흙내가 향긋하고, 길섶에 거름더미를 덮어두었던 비닐과 갑바를 칭칭 동여맨 줄을 풀어내니 냄새는 코를 자극시킨다. 도시의 악취는 신고를 유발하지만, 농번기의 암모니아는 고향의 냄새라는 최면 마스크를 쓰고 그 냄새를 풍겨도 항의하는 사람이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마을마다 뭐든지 남들보다 빨리, 더 부지런하게 해치우는 농부들이 꼭 계신다. 아직 거름더미 비닐도 벗겨내지 못한 집이 있는가 하면 벌써 밭을 갈고 틈날때마다 준비한 마늘쪽을 보물처럼 땅에 심는 촌로들이 농번기를 주름잡는다. 어른들의 구부린 허리와 저리는 무릎통증을 먹고 크는 마늘은 땅속에서 마늘을 잉태해 해풍을 맞고 알싸한 육쪽마늘로 자라난다. 한겨울에도 파릇한 남해를 만날 수 있는 농부의 수고로운 마늘밭이다.
 
 바쁜 주말 낮시간에 걸려온 엄마의 전화목소리가 아주 높다. 
 "오늘부터 엄마도 집으로 도시락 배달을 온닷꼬 자랑칠라고 전화했다."
 "도시락?"
 "으, 너그매도 독거노인 아이가. 그래서 하루에 한번씩 도시락을 배달해준다."
 "독거노인 도시락 배달. 그게 어떻게 운좋게 엄마한테까지 기회가 갔데? 우리집은 공짜하고는 운이 없는 집안인데."
 "내가 밥흐기 싫어가꼬 도시락 배달 신청했다 아이가."
 "진짜? 우와, 엄마 진짜 대단한데." 나는 엄마가 로또 복권에라도 당첨이 된 양 환호를 보냈다. 
 "우리딸이 많이 순진해졌네. 그건 뻥이고, 농삿일 바뿌닷꼬 마을회관에서 같이 먹던 점심을 코로나라서 도시락으로 준다쿠네."
 알고 보니 독거노인에게 배달되는 도시락이 아니라 남해군에서 시행하는 `농번기 마을공동급식 지원사업`을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농번기는 시체도 일어나 일을 한다는 아주 바쁜 시기다. 남자들은 큰 기계를 주로 다루고, 여자들은 집안살림에 식사준비에 잔손가는 농사일까지 하려면 허리 펼 틈이 없었다. 농번기에는 식구 외에 일꾼들이 있다면 반찬에라도 한 번 더 신경써야 하는데 농업기술센터에서 도시락 배달을 해주니 한끼라도 편하게 앉아 드신다니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때 그시절, 아침상 숟가락을 놓자마자 들판으로 나왔다. 일을 하다가도 정오가 되기 전 엄마들은 점심을 챙기러 집으로 가 광주리에 밥과 반찬을 담아 머리위에 이고 논두렁위를 사뿐사뿐 새각시 걸음으로 왔다. 요즘은 들밥을 내오는 집은 없다. 마을 곳곳에 들어선 편의점 덕에 도시락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아메리카노를 숭늉처럼 마신다. 
 
 나는 시골, 남해에 살아도 농사일을 하지는 않지만 업무로 바쁠 때는 우렁각시가 와서 밥상을 차려놓고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이따끔씩 하는데 농사짓는 어머님들은 그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가을걷이와 파종준비로 바쁜 지금 농번기가 남이 해준 밥이 최고로 맛있을 때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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