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잘못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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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잘못한 일
  • 남해타임즈
  • 승인 2021.10.08 10:21
  • 호수 76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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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관호 / 본지칼럼니스트
서 관 호본지칼럼니스트
서 관 호
본지칼럼니스트

 나는 부산 화명동에서 한 20년을 살았다. 그동안 뒷산의 한 산밭을 빌려 채소를 가꿔 먹었다. 밭일을 하다가 여가가 나면 그 산밭보다 조금 높은 곳까지 등산을 하곤 했는데, 그때 그곳에서 아주 잘 가꿔놓은 산밭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 주인 할아버지를 만나 채소농사 이야기를 나누다가,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안 좋아 보여서 여쭤보았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6·25때 대구의 한 공고를 다니다가(당시 17세) 학도병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동료들은 모두 전사하고 나 혼자 살아서 돌아왔다. 그런데 입대적령이 되어 다시 군대에 잡혀 갔다. 그것은 학도병은 급조된 군대이고 거의 전멸했기 때문에 군에도 군적이 없었고, 학교도 불타서 학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두 차례 6년여의 군대생활, 그것도 전쟁을 치르면서 대퇴부 관통상까지 입었지만 국가유공자도 되지 못하고, 평생을 신병에 시달리며 오늘에 이르렀다. 군적도 학적도 없는 사람이라 보훈처에서도 아무런 대우 방법이 없다고 하더라."  


 이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세상에, 이분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이 스쳐갔고, `내가 어찌했든 다시 문을 두드려 드려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어 달 후 나는 시골로 귀향을 하게 되었고 이미 10년 세월이 가버렸다. 팔순에 가까운 춘추였고, 건강이 매우 나빠 숨길이 가빴던 상태를 짐작건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그때 내가 마음만 먹었지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실기해버린 것이 아쉽고 안타까워 늘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산에서 지하철을 타려는데 이웃 산밭에서 채소를 가꾸시던 한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 안부를 묻기도 전에 그 할아버지 안부부터 여쭸다. 


 "선생께서 시골 간 이듬해 벌써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는 마치 내 친족이 세상을 떠난 소식이라도 들은 것처럼 가슴에 냉기가 돌았다. 그리고 그때의 회한이 지금도 가끔씩 뇌리를 스쳐간다. 그리고 그분의 호소를 받아들여주지 않았던 국가와 그 공무원에게 준엄한 호통을 안겨주지 못한 나의 무성의에 스스로 못난 놈임을 자책하며 살고 있다. 


 서류가 없는 것은 국가의 책임인데 당사자가 무엇으로 자신의 이력을 입증하라고 한단 말인가? 군적과 학적이 없어진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학도병 한 부대가 참전을 했다면 그 동원에 참여했던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 군대를 통솔했던 상부의 사람이 있을 것이며, 다수의 사람이 죽었으니 전몰장병 유족도 있을 것 아닌가? 국가가 이것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한 당사자가 경험한 모든 상황을 자세히 들어보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금방 알 수 있다. 이러한 정황증거를 무시한 채 그 공무원은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모든 불이익과 억울함을 한 개인에게 뒤집어씌우다니, 대명천지에 이런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살다보니 배울 만큼 배운 나 자신도 억울할 때가 많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이웃의 억울함을 만나게 된다. 그때마다 나에겐 용기가 없었고, 바쁘다는 핑계로 또 때로는 차일피일 미루다가 실기를 하고 말았다. 여기서 용기가 없었다는 말은 작은 손해는 내가 감수하면 편하다고 생각하는 안일함과 남의 일에 나설 오지랖은 못 된다는 나약함을 말한다. 그래서 세상은 늘 불공평하고 못된 놈이 더 우쭐대고 상대적으로 착한 사람이 더 숨죽이고 사는 세상이 되었다. 
 아마도 그 할아버지를 퇴짜 놓았던 그 공무원은 일생을 공무원으로 군림하며 호의호식하고 살다가 퇴직 때는 훈장까지 받고 이후에는 고액의 연금을 받아 챙기며 살고 있을 것이다. 반대로 그 할아버지의 삶이란 무엇인가. 엄연한 참전용사인데도 곱절의 군 복무를 한 것이고, 국가유공자의 예우는 커녕 망가진 육신으로 시낭고낭 신음과 가난을 베개 삼아 살다가 어느 산밭 고랑에 쓰러져 죽었을 것이다. 


 이런 불공평, 이런 불이익이 소위 민주국가란 곳에서 있어도 되는 것인가? 이러한 암 덩어리를 수술하지 못하고 실기한 나 자신이 엄청나게 밉고 가소롭다. 공부는 해서 무엇하며 어떤 계관을 쓰고 있으면 무엇하는가? 길가 청소는 무학자도 할 수 있지만 이러한 일은 따질 만큼 따질 수 있는 논리를 충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세상을 쥐락펴락한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종합하고 분석하는 능력을 말한다. 요즘에 와서 인문학이 깃발을 올리고 있다. 인문학은 삶의 지혜를 담고 있는 학문이다.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천을 포함한 진리의 총체이다. 50여 명의 의병장을 길러낸 남명 선생이 떠오른다. 더 배우고 더 연마해서 남은 인생, 더는 후회 없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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