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팔아 친구 살 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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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팔아 친구 살 때라
  • 남해타임즈
  • 승인 2021.11.12 10:22
  • 호수 76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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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의 남해일기
하경은(앞줄 오른쪽부터), 하경은의 동생 경수, 김연경, 김연경의 동생 철수, 김형식, 김형식의 형 형길. 남자끼리 여자끼리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 선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하경은(앞줄 오른쪽부터), 하경은의 동생 경수, 김연경, 김연경의 동생 철수, 김형식, 김형식의 형 형길. 남자끼리 여자끼리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 선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출근길은 마음부터 바빠져온다. 고향 가는 버스표를 예약해놓은 사람처럼 칼 같이 움직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흉내를 자주 낸다. 아이를 학교 교문 근처에 내려주고, 골목의 곰탁곰탁을 돌아 주차를 하고 나면 뒤를 돌아볼 새 없이 사무실로 직진이다. 그날도 100미터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가뿐 숨을 몰아쉬며 사무실 어귀에 도착할 무렵, 중년여성 두 분의 대화가 궁금해지도록 소곤거렸다.


 "아이구, 무슨 재미가 그리 좋심미까, 똑 여고생들 같심미다" 라고 아침인사를 드렸다.
 "우리가 그래 보이더나. 이번에 요양보호사 시험치러 간닷꼬 이야기를 해서 내 경험을 이야기를 좀 했제."
 "아~ 그래예. 사무실에서 일하시고, 또 공부도 하시고, 이야기를 재밌고로 하고 웃음시로 산께능 언니들은 자꾸 젊어지는 갑심미다."
 아침부터 기분좋으라고 슬쩍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저들만의 세상에 심취해서 이야기하는 여고생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때는 바야흐로 1990년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남해에서 다녔다. 걸어서 10분이내의 거리에 살던 경은이와는 그애가 대도시로 나가기 전까지 절친이었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를 같은 곳으로 다녔다. 유치원 때는 서로 그네를 밀어주고 탔다. 중고등학교때는 걸어서 등교하고, 걸어서 하교를 하면서 서로의 동네를 한번씩 교대로 왔다. 어떨 땐 학교에서 많이 내주는 숙제가 너무 싫은 거, 어떤 때는 동생들이 말을 안 듣는다는 거, 학교친구들 중 어느 애가 얄밉다는 것까지도 우리의 이야기 주제였다. 
 
 우리의 공통된 의견은 `공부만 하는 애들은 무슨 재미로 살긋노. 공부가 인생에 전부는 아니잖아. 우리가 또 학교에 가면 공부는 못해도 친구들 재밌게 해준다 아이가`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불태운다는 거였다. 이웃한 길을 걸어서 이야기하면서 가면 농사짓던 어르신들께서 우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시고


 "너그들은 믄 이~약이 그리 재밌네. 학조서 안 만내나."
 "아니예. 같은반이라서 학교에서도 만납니다."
 "학조서 바도 그리 재미지고로 허네. 너그들 허는기 우찌나 좋고 이삔지, 싸우지 말고 의논 좋고로 해라."
 "하모예. 우리는 안 싸워예. 여기 고개 넘을라쿠몬 무서븐데, 싸우몬 둘다 손해라예."
 한때는 우범지대라 소문 났던 고개가 지켜준 우정이었다.
 
 형길이, 경은이와 나는 같은 해에 태어나 학교를 같이 다녔고, 형식이와 경수, 철수는 우리들의 두해 아래 동생들로 우리들의 유치원 소풍까지 따라다녔다. 우리들의 친구들이 모여 놀면 노는 곳에 같이 끼려고 우리들의 동태를 살피고, 잠깐의 틈이 보이면 어느새 술래를 하고 있던 동생들이었다. 육아가 따로 없었던 방목의 시절이었다. 요즘 생각하면 세명의 엄마들이, 두 번씩이나 같은 해에 배가 불러 다녔을 재미난 추억 같다. 어쩌면 그 시절에는 연년생을 내리 출산하고도 배 꺼지기 무섭게 또 보름달 같은 배를 하고 다녔던 아낙들이 많았을 것이다. 우리반에는 8공주도 있었으니 …….
 
 휴일이면 이웃마을에 살던 경은이와는 전화로 먼저 신호를 한 다음 각자의 집에서 출발해 늘 만나는 중간지점의 논두렁에서 만나 이야기를 했다. 누군가의 집으로 가서 학교에서 추천해 준 책도 읽고, 독서토론회 준비도 했다. 우리 둘이서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결국엔 만담으로 끝나기도 했다. 수학문제도 풀고, 영어단어도 외웠다. 공부를 하는 시간에 오랜 비중을 두지 않았다. 잠깐 공부하는 시늉을 하고, 어른들이 들로 나가면 우리는 국자로 `똥과자(요즘은 `달고나`라는 이름으로 인기있는 것)`를 만들어 먹거나 읍내로 탈출했다. 무거워서 날지 못하는 비행소녀단이었다.
 
 우리집의 밥상머리 교육에 이은 엄마의 교육철학은 많은 것 중에 특히 강조하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친구집에 놀러 가더라도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라. 둘째, 먹는 것은 아무거나 먹더라도 잠은 꼭 집에서 자야 한다. 나는 늘 1번은 지키지 못했고, 2번도 지키고 싶지 않았으나 꼭 데리러 오는 부모님 덕에 학창시절에 친구들과의 파자마파티는 꿈꾸지 못했다. 
 
 엄마의 교육철학이 마르지 않는 샘처럼, 마치지 못하는 노래처럼, 늘어진 카세트테이프처럼 계속되면 아빠가 불쑥 한마디 하셨다.
 "지금은 무슨 소리해도 안 들린다. 부모 팔아 친구 살 때라."
 그 한마디면 엄마는 마술처럼 말을 멈추었다.
 
 가을은 위로를 받고, 위로를 주는 계절. 올해 가을은 친구를 만나러 남해로 가시지예. 특히, 1973년생 언니 오빠들, 1973년부터 남해사람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다리친구 `남해대교`를 위로하러 안 가실래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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