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불 밝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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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 불 밝히고
  • 남해타임즈
  • 승인 2021.11.19 10:50
  • 호수 77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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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의 남해일기

 가족들끼리 다 같이 나가는 주말 외출에 딸아이는 동참하지 않고 책상 앞에 반납하고 앉아있었다.


 "준비하고 나가자. 양말신고, 잠바만 입으면 되겠네."
 "오늘 저는 집에 있으면 안 될까요?"
 "일주일 동안 고생했는데 주말에는 나가서 자연도 즐기고, 바람도 쐬고, 맛있는 것도 좀 먹고 그렇게 하지?"
 "요즘에 우리 남해에서 일어난 3·1운동에 대한 연극을 하는데 거기에 제가 노래 들어가는 거 작사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조용하게 저 혼자 생각 좀 하면 안 될까요?"
 "연극반에서 하는 게 아니고 학교에서 그런 것도 하나? 재밌겠다. 학교에서 주는 대본으로 하는 게 아니었어?"
 "학교에서 대본은 주는데 연극에 들어가는 노래랑 연기 같은 건 우리 모둠에서 색다르게 꾸며서 수업시간에 발표하는 거예요."
 "그래? 그러면 맡은 과제를 해야겠네."
 "네. 요즘에는 모여서 하는 활동을 못하니까 저는 학예발표회 안하고 그런 게 좀 아쉬워요."
 학예발표회는 학교 수업시간 외에 틈나는 시간마다 악기 연습, 노래 연습, 율동이나 연극까지 다양하게 연습을 했다. 대강당에서 그동안의 기량을 선보이고 학예발표회가 끝나고 나면 몸살을 앓던 그런 시간 아니었던가. 워낙에 모임활동도 자제하고, 단체활동이 취소되다 보니 아이는 아이대로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했다.
 
 남해에 살고 있는 군민들과 남해를 떠난 출향인들의 화합잔치인 군민의 날 행사와 문예인들의 작품을 선보이고, 체육인들의 기량을 뽐내는 화전문화제는 가을의 백미였다. 읍내의 도로 가로수에는 시와 그림이 있는 액자가 걸렸고, 정해진 공간마다 서예나 그림, 조각들을 전시하는 것으로 문화의 꽃을 피어 올렸다. 화전문화제의 전야제에는 여고생들이 청사초롱을 들고 남해읍내 시가지를 행진하는 것으로 그 시작을 알렸다. 땅거미가 지기 전에 각자 준비해 온 한복으로 갈아입고 행진 대열을 해서 학교 운동장에서부터 출발을 하면 어둠사이로 반짝이는 불빛들이 새어 나갈 때 우리도 잔치의 구성원이 되어 함께 빛났다. 늦가을이면 남해의 읍내는 대낮처럼 밝아 번쩍거렸다. 
 
 한복에 대한 일화가 생각난다. 30 여 년 전, 우리집에는 한복이 한 벌 있었다. 엄마가 시집을 오면서 입고 온 것이었다. 그 당시 개미허리였던 엄마의 한복을 꺼내 입으니 치마는 어찌 둘렀으나, 저고리는 반팔에 가까워 입고 가면 남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뻔한 살림에 한번 입고 말 한복을 살 엄마도 아니었다. 엄마는 마실 좀 나갔다 온다더니 한복을 구해 곧 돌아왔다. 
 "엄마, 능력 좀 되는데. 한복을 바로 이렇게 구하다니."
 "니가 좀 자그마했으몬 엄마꺼 입어도 될낀데, 떡대같이 키운 내 잘못도 있으니 내가 발품 팔아야지."
 "엄마, 이거 누구껀데?"
 "옆집. 제일 최근에 시집 와서 한복이 제일 세련된기다. 일단 맞는지부터 확인하고로 한번 입어보자. 안맞으면 또 다른집도 가봐야제."
 "엄마, 딱 맞네. 바로 내 옷인데. 다림질만 좀 하면 되겠는데."
 
 나는 교복치마도 한치의 오차없이 주름을 잡고, 셔츠의 깃도 잘 다려 나름 다림질 부심이 있었다. 한복을 다림질판에 잘 펴놓고 다리미를 올리는 순간 한복이 지지직 눌어붙고 말았다. 엄마에게 두 번 혼 날거 한 번에 혼나자 싶어 비밀로 하고, 구멍난 한복을 챙겨 넣어 학교로 갔다. 밤에 입으니 구멍 난 부분도 보이지 않았다. 새댁 한복 태워먹은 간 큰 천하무적 여고생.

 전야제가 끝나고 날이 밝으면 운동장에서 다함께 모여 체조를 하고, 인기최고인 10개 읍면마다 특성을 살린 가장행렬이 시작된다. 힘든 농사일이나 바닷일을 끝내고, 자투리 시간에 작품을 만들고 마을주민들의 단결까지 이끌어 내는 시간이다. 화려하고 정돈된 행진 속에 숨겨진 백조의 발버둥이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는 순간이랄까. 널따란 공설운동장에서 읍면 대항 체육경기가 시작되면 스탠드마다 열매처럼 붙어 앉은 사람들의 응원이 힘차게 들린다. 구경꾼도 응원꾼도 모두 재미난 풍경이다. 운동장 주변으로는 포장을 치고 읍면별 식당도 열렸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걸죽한 막걸리도 나누고, 지역별로 맛깔난 음식도 서로 나누면 마음까지 풍성해지는 시간이다. 행사의 말미에는 공설운동장에서 불꽃놀이가 열렸는데, 폭죽이 하늘끝까지 오르다가 하늘에서 꽃을 터트리면 휘영청 밝은밤이 되었다.
 
 2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군민의 날과 화전문화제는 올해는 코로나로 성대하게 열리지 못했다. 금산 정상에서 군민기원제를 올리고, 다섯 분의 군민대상을 선정하고 시상하는 것으로 군민잔치를 대신했다. 아이가 개최하지 못한 학예발표회를 그리워하는 만큼이나 나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다음 행사엔 모두가 마스크를 벗고, 실컷 웃고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를 정도로 즐기는 시간이 오길 바란다. 2022년 남해군 방문의 해에는 북적북적 남해가 되도록 모여 노는 예행연습이라도 해야 될 것 같다. 남해의 가을은 황금보다 더 빛나고, 밤에 더 아름다운 것을 다리 건너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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