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 김만중 선생의 발자취 따라 구운몽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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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 김만중 선생의 발자취 따라 구운몽길을 걷다
  • 남해타임즈
  • 승인 2021.12.03 10:20
  • 호수 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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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코스 구운몽길
김만중문학관
김만중문학관

 마을 안길을 따라 왼쪽으로 이동한다. 황토색 시멘트로 잘 포장된 도로를 따라 가면 아름드리 동백나무,참나무, 후박나무 등이 들어서 있고 2백미터쯤 사부작 사부작 걸어가면 위로 허묘로 가는 길, 작은 비석에 `서포 김만중 무덤터` 글씨가 있고 이곳이 바로 "노지나멧등"이라고 하는데 노도 사람들은 "노자묵고 할배"라 불렀다고 한다. 어떤 날은 노자니 언덕에 올라가서 물끄러미 바다만 바라보고 있다는 이 할배가 바로 서포 김만중 선생이고 소나무 우거진 언덕위에 선생의 허묘에만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김만중 문학관은 노도의 큰골에 자리 잡고 1층에는 영상관, 2층에는 해평윤씨 어머니 이야기, 김만중의 가계도,연보, 360수 중에서 주요시문, 주요작품인 룙구운몽룚과 룙사씨남정기룚, 룙서포만필룚 등이 정리 기록돼 있고 위리안치된 초옥을 재현해 두었다. 2층 전시관 시작을 알리는 벽면에 "노도에서 피어난 김만중의 꿈"을 적어 놓았고 그 아래로 "세상의 모든 일이 꿈과 같고, 물거품과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이 글은 김만중 선생이 선천에서 유배 중 썼다고 하는 한글소설 룙구운몽룚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일장춘몽의 주제를 담은 글이다.  김만중 선생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던 어머니 해평윤씨, 할머니 정혜옹주가 친히 안아 기르시고, 룙소학룚을 가르쳤다고 한다. 정혜옹주는 조선의 14대 왕인 선조와 후궁 인빈 김씨의 차녀로 신성군의 친동생이며 인조의 고모이기도 하다. 정혜옹주는 1596년 윤두수의 손자 윤신지와 혼인하였고 글을 잘 짓고 서화에 능해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 윤씨는 14세에 아버지인 김익겸과 혼인했다. 안타깝게도 나이 21살 때, 남편 김익겸과 사별했고 큰 아들 김만기와 유복자 김만중을 위해 일생을 바친 분이다. 룙소학룚룙사략룚 룙당시룚를 가르치고 룙시경룚과 룙사서룚는 책을 빌려다가 손수 필사하여 읽게 해 김만중의 삶과 문학에 영향을 준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남해로 유배온 해 생신날(1689년 9월 25일) 어머니를 그리며 사모곡 `사친시(思母曲 思親詩)`를 지었는데

노도와 주상절리 해안
노도와 주상절리 해안

 
 今朝欲寫思親語 금조욕사사친어 오늘 아침 어머니를 그립다는 말을 쓰자 하니,
 
 字未成時淚已滋 자미성시루이자 글자도 되기 전에 눈물이 앞을 가리네
 
 幾度濡毫還復擲 기도유호환부척 몇 번이나 붓을 적셨다가 다시 던져 버렸던고
 
 集中應缺海南詩 집붕응결해남시 문집에서 남해 시는 마땅히 빼어버려야 하리
 
 그 다음 해 유배지였던 이곳 초옥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부고(1689년 12월 22일 별세, 1690년 1월 접수)를 듣고는 식음을 전폐하고 대성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구운몽 공원으로 올라가면 팔선녀 조형물이 있다. 육관도사는 성진을 당나라 양처사집의 양소유로 태어나게 하고 양소유는 팔선녀인 정경패, 이소화, 진채봉, 가춘운 ,계섬월, 적경홍 ,심요연, 백릉파 등 여덟 여자들을 아내로 삼아 영화롭게 살지만 끝내 인생무상을 느끼고 팔선녀와 함께 불문에 귀의한다는 내용이다. 사씨남정기 공원에는 등장인물의 조형물이 산 능선을 따라 조성되어 있다. 나라의 앞날이 걱정되었던 선생은 사씨남정기를 지으며 임금의 성총이 흐려지지 않기를 바랐다. 유한림은 숙종이요, 사씨는 현덕함의 인현왕후요, 교씨는 교활함의 장희빈, 모사꾼의 동청은 조사석으로 봐도 되겠다. 이로써 허묘, 김만중 문학관, 초옥, 구운몽공원, 사씨남정기 공원, 등 노도를 일주하면서 김만중의 문학세계를 만나 볼 수 있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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