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의 ‘대표스토리’가 필요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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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대표스토리’가 필요하다 2
  • 박성재(남해역사연구회 유배문화연구소장)
  • 승인 2009.12.31 15:47
  • 호수 18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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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중은 소동파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보광산 스님 설동에게 불서를 빌리다”

서포 김만중(1637~1692)은 좥구운몽좦을 제작했다. 김만중이 좥구운몽좦을 언제 어디서 지었는가에 대해선 학자들 간에 크게 양론이 있었다. 김만중의 평북 선천(宣川) 유배 때(숙종 13~4, 1687~8)라는 설과, 경남 남해(南海) 유배 때(숙종 15~8, 1689~92)라는 설이 그것이다.

좥구운몽좦에 대한 언급은 여러 문헌에서 발견된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구운몽은 서포가 귀양 갔을 때 대부인의 근심을 풀어드리기 위해 하룻밤에 지었다”[각주 : 이규경,「소설변증설」, 좥오주연문장전산고좦권7.] 라고 하였고, 도암(陶庵) 이재(李縡)의 삼관기(三官記)에서는 “패설에 구운몽이라는 것이 있으니 서포가 지은 것이다. 큰 뜻은 공명부귀를 일장춘몽에 돌린 것인데 대부인의 근심걱정을 풀어드리고자 한 것이다”[각주 : 이재의 삼관기(三官記) 이부(耳部), 좥패림(稗林)좦 제9집.] 라고 했다.

서포연보(西浦年譜)에서는 “또 글을 지어 부쳐서 윤부인의 소일거리를 삼게 했는데 그 글의 요지는 일체의 부귀영화가 모두 몽환이라는 것이니 또한 부군이 뜻을 넓히고 슬픔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각주 : 좥西浦年譜좦, p.227] 라고 적고 있다. 이들 기록 모두 좥구운몽좦이 김만중이 유배생활 중 어머니의 근심을 위로하기 위해 인생무상을 주제로 쓴 작품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김만중이 불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써야 했던 이유가 어머니뿐만이 아니라, 남해 적소에서 승려와의 만남 등으로 주위의 환경 변화와 자신의 내부에도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좥구운몽좦의 저작 시기를 좥서포연보좦만으로 구체적으로 밝힐 도리는 없다. 김만중이 선천 배소에서 방환된 것은 숙종 14년 11월 일이었다고 해 그저 좥구운몽좦의 저작이 숙종 13년(1687) 9월 말부터 숙종 14년(1688) 11월 사이의 1년 간 어느 때에 저작됐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김만중의 불교사상에 대한 인식을 밝히기 위한 자료로는 서포집,서포연보 등을 중심으로 하기로 한다.

좥구운몽좦의 저작 시기가 선천 유배당시로 이미 밝혀졌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필자는 김만중은 좥구운몽좦지은 당시에 불교사상적 인생관을 확립한 시기는 선천이 아니라 남해유배지에서 체득한 것으로 위의 자료를 통하여 밝힐 수 있다는 전제에서 차봉광승설동운걸불서(次普光僧雪洞韻乞佛書-보광 승설동에게서 불서를 빌리다)라는 시가 작품적 사실로서의 불교사상적 주제와 작가적 사실로서의 불교관 확립이 불연지 남해유배지에서 스님들과의 교유 등으로 동일 시공에서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작자 미상의 서표연보만으로 선천 배소에서 저작됐다고 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김만중의 육필인 서포집에 실린 시편들의 순서 중 남해유배 때 「구운몽」이 저작돼졌다는 구체적인 정황을 차봉광승설동운걸불서(次普光僧雪洞韻乞佛書)를 중심으로 ‘김만중이 자신을 소동파와 동일시 한 배경’을 살펴보는 것을 통해 평가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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