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에게 부침(4) - 엄귀손과 홍길동의 우정에 기대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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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에게 부침(4) - 엄귀손과 홍길동의 우정에 기대어 -
  • 남해타임즈
  • 승인 2010.01.11 16:42
  • 호수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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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남해 유배문학 공모전 대상 윤정아 作

본지는 올해 처음으로 남해군과 남해문화원이 주최한 제1회 남해유배문학상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윤정아 작가의 소설 ‘벗에게 부침’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벗에게 부침(4) - 엄귀손과 홍길동의 우정에 기대어 -

형님, 감히 형님이라 부르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삼순(三旬)전에 서현과 혼례를 올렸습니다. 봉래산에 머물지는 아니했으나 여인네가 험준한 산을 넘어가며 저를 찾는다는 소식에 한 걸음에 달려갔지요. 달이 높은 밤이었습니다.

잠들지 않은 서현은 바람이 선선한 산사(山寺) 마당을 천천히 거닐고 있었습니다. 소매단과 치맛단이 날근날근 해진 옷을 걸쳤으나 단아한 이마와 맑은 눈빛이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형님께서 처음 서현을 거두어 주십사 어머님께 부탁하였을 때 망설이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서현의 어머님께서 큰 마님의 어릴 적 글 동무였다는 것을요. 큰 마님의 시비(侍婢)로 자란 어머님은 두 분의 시중드는 일이 참 재미있었노라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한 분은 성질이 단호해 늘 호통이셨고 또 한 분은 참하고 얌전하여 늘 토닥여주시곤 하였다 했습니다.

큰 마님보다 먼저 혼담이 들었던 서현의 어머님께서 실은 후실에게 얻은 소생이란 것이 밝혀졌을 때 혼담이 깨진 것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 대신 들게 된 것이 큰 마님이었다 했습니다.

그 후 소식을 모르다 형님께서 서현을 부탁하셨을 때, 비로소 옛날 마음 좋았던 아씨께서 엄가네 후실로 들어가 서현을 낳다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됐다 하셨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큰 마님께서 서현을 미워하실까 염려 되셨던 모양입니다. 결국 판서 어르신께서 조용히 어미처럼 거두어 주라는 말씀이 있으신 후에야 침모로 들이게 된 것 입니다.

제 어머니께서는 처음부터 서현을 마음에 두셨음이 분명합니다. 성품이 어질고 마음이 고우니 좋은 배필이 될 이라며 칭찬하셨습니다.

재가(再嫁)가 걸리느냐며 넌지시 묻기도 하셨습니다. 한번도 남의 손에 넘기지 않으셨던 제 옷도 서현에게 지으라 하셨고 손이 바쁜 날은 가끔씩 겸상도 허락했습니다.

저리 두면 허름한 사내의 허망한 아내 자리로 가게 될 것이라면서 은근 저를 독촉하시곤 하였습니다. 집을 떠나온 일이 없었다면 아마 이미 오래전에 제 아내가 됐을 것입니다.

서현은 형님의 서찰과 함께 곱게 바느질된 두루마기와 잘 만들어진 태사혜를 이어 꺼내어 놓았습니다.

집을 떠난 뒤로 여러번 덧대어 입어 온 두루마기를 벗고 새 옷을 입었습니다. 어림짐작으로 만들었을 옷인데도 품이며 기장이 꼭 들어맞았습니다. 오히려 어머님이 보내신 태사혜가 맞지 않아 웃음 지었습니다.

서현은 다시 떠나려 했으나 제가 잡았습니다. 눈물을 닦아주고 백년가약 맺기를 부탁하였습니다. 부족하다 부족하다 거듭 고개를 돌리는 서현을 산막으로 옮겨와 동무들 앞에서 합환주를 나누어 마시고 부부가 되었습니다. 형님께서도 기꺼워 하셨으면 합니다.

형님! 임금께서, 조정에서 대도(大盜)라 칭하는 이가 제가 맞습니다.

백여명의 도적 패거리라 칭하는 이가 실은 열 명이 채 안 되는 작은 무리인 것이 우습긴 해도, 잡아들이려 혈안이 되어 있는 괴수가 저인 것은 분명합니다.

병판이 홍길동을 일러 조선의 가장 큰 적이라 하였다지요. 관을 털어 백성에게 나누어준다는 민초들의 과장된 칭찬이 권세를 쥐고 있는 세력들에게는 얼마나 큰 짐이 되는지 잠작 되고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멈출 수 없는 일이고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집을 나서고 얼마 되지 않아 의주 근처에서 동진이라 하는 이를 만났습니다. 술청에 앉아 거하게 마시기에 그저 평범한 백성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몇 순배 술이 돌자 침묵하던 동진이 입을 열었습니다.

동진은 한 때 두 마지기의 논을 경작하던 자작농이었다 하더이다. 흉년이 들던 해, 벼 한 섬 거두지 못한 땅을 고스란히 관에 빼앗기고 마을에 들른 명나라를 오가는 상인에게 열두 살 먹은 딸을 팔았다 했습니다.

다음 해 흉년에는 열세 살짜리 아들을 같은 무리들 틈에 막일꾼으로 보내었는데 임진강을 건너다 물에 빠져 죽었답니다. 애지중지하던 남매를 차례로 잃은 다음 해에는 집 안팎을 쓸고 닦아가며 살림을 꾸리던 살뜰한 내자가 정지에 목을 매었답니다.

장례를 치르려 하니 쌀커녕 독조차 남은 게 없어 멍석에 말아 지게에 얹어 먼 산기슭에 묻어주고 오는 길이라 했습니다. 그 서러움이 동진의 마음을 사납게 하였는지 함부로 상을 엎고 주정을 하기에 기거하던 산막으로 데리고 와 지금껏 같이 지내고 있습니다.

동진과 숯을 구워 팔던 중이었습니다. 의주에서 좀 산다하는 장사치의 집에 숯과 나무를 들이라 하여 열다섯 짐의 땔나무를 들여놓고 돌아서는데 광에서 신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성질이 괄괄한 동진이 빗장을 부수고 들어가 보니 이제 열 살이 갓 넘을까 싶은 아이가 처참한 몰골로 매달려 있었습니다. 매를 얼마나 맞았는지 찢어진 옷이 살갗에 붙어 겨울인데도 역한 냄새가 올라왔습니다.

아이를 내려놓고 상처를 살피는 중에 아이 어미가 물 한 그릇을 들고 왔더이다. 울음을 삼키며 아이를 어루는 손길 위로 사연을 말하는데 기가 막히었습니다. 아이의 위로 열 넷 되는 누이가 있는데 주인이 탐하려 방안에 들이는 걸 막아서다 사흘을 내리 맞았다 합니다.

양반도 관원도 아닌 중인임에도 뒤를 봐주는 세력가들에게 재물을 가져다주니 탐욕이 하늘을 찌른다 하며 울었습니다. 아이의 누이는 오늘 아침 동생을 살핀 후 자결했다며 참으로 서럽게 울었습니다.

자작농이었던 남편이 빚에 땅을 빼앗기자 화를 참지 못해 속앓이로 죽은 뒤, 종의 신분도 아닌데 종처럼 부림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들인 나무값을 받지 않는 대신 지게에 아이를 얹고 산막으로 들어왔습니다. 사흘 뒤 아이의 어미 되는 이도 도망하여 같이 살고 있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설수라 합니다.

아비의 죄를 대신 하겠다 달려들다 혀를 잘린 이, 종으로 팔려가다 도망친 이, 배가 고파 산에 오른 이, 빚에 쫓기다 동굴에 숨은 이, 부역이 힘겨워 도망친 이, 나라가 버린 이들이 모여 소박하게 살고자 하는 곳이 산막입니다.

세상 소문에는 도적떼가 육척의 키에 축지를 하며 둔갑과 요술을 부린다 한다는데 산막의 식구들에게는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일 따름입니다.

신체가 멀쩡한 장정이라봐야 열 손가락에 꼽을 만합니다. 관을 덮쳐 백성에게 나눠 주는 의적이라는 소문도 과장된 것에 불과 합니다.

지난여름, 전염병이 고을에 창궐하였을 때 관에서는 아전과 그 식구들만 관에 들인 후 약재창고를 닫아버렸습니다.

설수의 다리를 살피러 산막에 오르내리던 의원이 병에 좋은 것들이 관아에 가득 차 있음에도 백성들이 괴질로 죽어간다 호소하여 창고를 털어내 백성을 살린 것입니다. 약재만 털었다 하지는 않겠습니다. 쇠약한 이들에게 죽이나마 떠먹이려 쌀도 몇 섬 끄집어내었습니다.

관에서 돌보지 않는 백성을 돌본 것이 죄라면 죄이겠지요. 이후로 많은 이들이 살림을 정리하고 아예 산으로 들어왔습니다. 거듭 만류했으나 산 사람들과 어울려 살다 산에 묻히고 싶다는 그들의 바람을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형님, 걱정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의 수장(首長)이 돼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인재를 알아보는 임금이라면, 백성을 안타깝게 여기는 임금이라면 언젠가 모두가 염원하는 세상이 열리겠지요.

서찰은 설수 편에 보냅니다. 영민한 아이이니 잘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설수가 떠난 뒤 산막도 정리할 생각입니다. 중앙에서 보낸 관군이 임진강을 건넜다니 우회하여 남쪽으로 이동할 생각입니다.

굳이 가려질 곳을 찾지 않아도 은거가 가능한 산세가 험한 곳이어야 할 것 입니다. 거처가 정해지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정사년(1497) 구월

혼례를 알리며 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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