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에게 부침(5) - 엄귀손과 홍길동의 우정에 기대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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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에게 부침(5) - 엄귀손과 홍길동의 우정에 기대어 -
  • 남해타임즈
  • 승인 2010.01.14 19:53
  • 호수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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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남해 유배문학 공모전 대상 윤정아 作

본지는 올해 처음으로 남해군과 남해문화원이 주최한 제1회 남해유배문학상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윤정아 작가의 소설 ‘벗에게 부침’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길동, 자네의 무사함을 기원하며 서찰을 전하네.

여름내 한 방울의 비가 애타더니 가을인데도 거둘 것이 하나 없는 들에 나와 있네. 백성들의 얼굴에 곤궁함이 가시지 않으니 녹을 받아 끼니를 채우는 것이 송구할 지경이라네. 하늘도 인정을 따라 사나워 진 것이겠지.

점필재 김종직 영감께서 부관참시(剖棺斬屍) 되었네. 임금의 술이 과한 탓인지, 성정이 황포해진 탓인지 모를 일이네. 임금의 화가 어디까지 미칠지도 모를 일이네. 산 자도 아니고 죽은 자에 대한 죄를 물어 벌을 준다하는 것도 합당치 않으려니와 이미 흩어진 육신을 꺼내어 세상에 내어 놓는 일은 참담하기 그지없으이. 참시(斬屍)된 시신을 수습하지 말라는 무지한 엄명이 있었다네. 폐비 윤씨의 어미 되는 이가 임금을 찾아 궁에 들어 온 뒤, 임금은 변하였네. 어질고 사려 깊던 임금이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광포함으로 궐을 요동시키고 백성을 불안하게 하고 자신을 아끼는 이들도 무참히도 베어내고 있네. 감성이 우세한 아이는 감정 절제가 안 될 것이라면 임금이 임금 되는 것을 꺼려하던 중신들의 염려가 들어맞은 셈이야. 임금은 녹수라 하는 여인의 품에서 외조모의 입으로 확인된 어미의 처참한 순간을 되새기며 나날이 난폭해 지고 있네. 혀가 뒤틀리는 고통 속에 죽어간 어머니를 생각한다는 외침을 백성의 창자가 끊기는 고통을 모르는 것도 임금이냐 호통하신 대왕대비마마와의 설전 이후 난폭함이 지나쳐 가더니 급기야 선왕대의 충신들을 가려내어 모두 베어내려 하고 있네. 이 막막함을 어디에 호소할 것인가. 올려다 볼 하늘이, 그늘이 되어줄 하늘이 무너졌으니 두려움이 엄습하여 숨 쉬는 것조차 쉽지 않으이.

행화(杏花)가 지천이던 지난 봄, 엷은 녹차를 청하며 숙위마마께서 부르셨네. 찻물이 식도록 아무 말씀 없이 눈물만 떨구셨네. 이유를 여쭈었더니 정원의 꽃 지는 모습만 지그시 바라보시더군. 재차 여쭈었으나 그저 몸조심하라고만 하셨네. 선왕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애쓰셨으나 가문의 권세가 크지 않기에 늘 뒷전에 밀려 계셨던 분이시네. 조용한 것이 슬픔으로 보였을 것이기에 대왕대비께서 숙위마마를 알뜰히 살펴주셨던 것인데 이런 지경을 당하고 보니 그 분이 베푼 자애도 원망이 될 것 같으이. 숙위마마께서 선왕의 후궁이었다는 이유로 변을 당하시지는 않을까 크게 염려되는 상황이라네.

궁의 여인네들에게 권세가 있던가. 운명에 대한 선택권이 있던가. 숙위께서 사가에 계실 때 그 성품이 조용하고 언사가 근엄하여 궁에 들어가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숙모의 걱정이 있으셨다 들었네. 나를 앉혀 두고 차를 청하셨을 때에도 살 수 있는 방법을 묻고 싶었던 건 아닐까 후회가 되네. 그 얹힌 마음을 읽지 못한 채 꽃 떨어지는 정경만 나누는 무지한 소인배가 얼마나 한심스러우셨을까. 하늘도 땅도 잃은 채 서성거리기만 하는 내 모습이 상상이 되는가, 길동.

인형이 급히 전갈하여 몸을 피하라 하였으나 한양에 남아 있으려 하네. 마음으로는 지금이라도 산막에 모인 백성처럼 빈손으로 자네를 찾아가고 싶으나 자네와 나의 교류에 대한 중신들의 염려가 역모로 비화될 수 있다는 인형의 말이 옳다 싶어 주저앉고 말았네.

길동, 부디 조심하여야 하네. 지난 번 어미를 만나러 산막에 다녀온 설수의 말로는 서현이 아이를 가졌다 하더군. 아비라는 존재는 말 그대로 자식의 하늘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늘이 하늘로서 가려줄 수 있을 때 자식은 그 그늘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부디 살아서 다시 볼 수 있을 때까지 몸 조심하게.

 

무오년(1498) 시월,

조정의 상황을 전하며 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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