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은 남해에서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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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몽은 남해에서 지어졌다
  • 박성재(남해역사연구회 유배문화연구소장)
  • 승인 2010.01.14 20:23
  • 호수 18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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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대표스토리’가 필요하다 3

서포집에 나타난 검산승(劍山僧)과 보광승(普光僧)의 동이성

서포집(西浦集) 권6에 나오는 ‘적리상수무이우(謫裏相隨無二友)’란 시 끝에는 ‘동파호도위집위남천이우(東坡號陶韋集爲南遷二友)’라고 적고 있다. 왜 김만중은 보광사 중 설동에게 불서를 빌려달라고 한 시 ‘차보광승설동운걸불서(次普光僧雪洞韻乞佛書)’에서 ‘남천이우(南遷二友)’라고 했으며, ‘보광승설동(普光僧雪洞)’이라 했는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서포집’권4. 145페이지에는 선천의 대표적인 산 이름을 ‘검산(劍山)’이라 밝히면서 ‘검산승천우(劍山僧天祐)’라고 한 점,그리고 ‘서포집’권6. 179페이지에서는 동일한 지명을 두고서 ‘보광산’이라 밝히면서 ‘차보광승설동운걸불서(次普光僧雪洞韻乞佛書)’라고 기록한 대목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 것인가? 이 중 ‘차보광승설동운걸불서(次普光僧雪洞韻乞佛書)’와 ‘설동차기능엄원각시이사지(雪洞借寄楞嚴圓覺詩以謝之)’를 보면 다음과 같다.

客懷蕭瑟易成哀(객회소슬역성애)
나그네 회포 쓸쓸하여 슬픔 되었는데
雪擁柴荊午未開(설옹자시오미개)
눈은 사립문 막아 한낮에도 닫혔네.
謫裏相隨無二友(적리상수무이우)
귀양살이 서로 좇을 두 친구 없으니
須君遠寄貝書來(수군원기패서래)
모름지기 그대는 멀리서 패서(貝書)를 보내주구료.
동파호도위집위남천이우(東坡號陶韋集爲南遷二友).「次普光僧雪洞韻乞佛書」[각주:西浦集 p179]

洞公知我晝饒眠(동공지아주요면)
내 낮잠 많음을 동공(洞公)이 알고
爲寄珠函貝葉篇 (위기주함패엽편)
주함(珠函)에 패엽(貝葉)을 보내 왔구려.
戰退睡魔三百萬 (전퇴수마삼백만)
패엽(貝葉) 읽어 수마(睡魔)를 다 물리치니
菩提樹影滿窓前 (보리수영만창전) 보리수(菩提樹) 그림자 창(窓)에 그득 어리네.
설동차기능엄원각시이사지(雪洞借寄楞嚴圓覺詩以謝之).[각주:西浦集. p.178~179]

위의 시를 보면 한 마디로 석가우언(釋迦寓言)이라고 할 ‘구운몽’의 저작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편(詩篇)의 내용은 선천적소를 떠나 남해 적소로 이배될 때 귀양살이 객회(客懷)를 달래기 위해 적소에서 보광사(普光寺) 승려인 설동(雪洞)에게 패서(貝書)를 보내주라는 내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서포는 설동(雪洞)에게 패서(楞嚴·圓覺經)를 빌어 수마(睡魔)를 물리치고 창전(窓前)에 보리수(菩提樹) 그림자를 그득케 했다는 내용이다. 작가적 사실을 두 가지 측면에서 확인케 하는 자료이다. 그것은 ①불교에 대한 인식론적 태도 ②선(禪)에 대한 실천적 성취도를 말한다. 그러나 김만중은 선천 적거 시(謫居時)에는 불교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갖지 못했다. 김만중이 선천 유배시절에도 불사(佛寺)를 찾고 승려와 교유는 했으나 불교에 천착하지 않았음을 대변해주는 자료이다.

“내가 서새(西塞)에 있을 때 한 노승(老僧)을 만났는데, 그 말이 이와 같았다. 또 말하기를 무량세계(無量世界)에는 단지 천지수화(天地水火) 네 가지가 있을 뿐이다. 불가(佛家)에서 사대(四大)라고 하는 것도 그 뜻은 다름이 없다. (中略) 오늘 우연히 ‘주자어류(朱子語類)’를 보았더니, (中略) 그 중(僧)의 설에 어떤 내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상세히 묻지 아니 했음을 후회한다.”[각주『西浦漫筆』, pp.203~204]

위의 글은 서포가 선천의 유배생활에서 어느 노승과 담론한 기록이다. 그 내용은 노승이 불교에 대하여 말한 것이 유가(儒家)의 설과 유사함을 남해 유배지에 와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은 서포가 선천적소에서도 불승과 교유는 했으나, 남해적거 시 불교에 천착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김만중은 남해 적거시 불교적 인생관을 확립하여 ‘구운몽’을 탄생케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위의 시(次普光僧雪洞韻乞佛書)에서 ‘선천시’와 ‘남해시’는 별개의 지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학자는 “여기서 보이는 ‘보광사’를 일부 학자들은 “남해의 금산(錦山)에 있는 보광산에 있는 보광사로 알지 모르나, 이 시가 김만중의 선천 초년「九月二十五日謫中作」바로 다음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서 선천의 ‘보광사’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면서 보광사는 ‘동국여지승람’이나 ‘선천읍지’에 보인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①西浦集 권6. 次普光僧雪洞韻乞佛書에서 ‘보광승설동’이라고 기록한 점, ②西浦集 권4에서는 선천의 불승(佛僧)과의 교유시 ‘선부추진일(宣府秋盡日)’시 바로 다음에 실려 있는 ‘검산승천우걸구제증(劍山僧天祐乞句題贈, 145쪽) 詩에서는 ‘검산(劍山)’이라고 쓴 것이 문제가 될 것 같다.

김만중은 ‘선부추진일(宣府秋盡日)’에서 宣川의 대표적인 산 이름인 검산(劍山)과 ‘차보광승설동운걸불서(次普光僧雪洞韻乞佛書)’에서 동일한 산 이름을 두고서 西浦集권6에서 보광사(普光寺)로 구분하여 기록하였다는 것은 재고(再考)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선천 작품의 성질상 ‘劍山’ 西浦集권4에서, ‘普光山’은 西浦集 권6에서 각기 다르게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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