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義士) 순국 100주년을 맞으면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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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義士) 순국 100주년을 맞으면서(1)
  • 김동규 고려대 명예교수
  • 승인 2010.03.19 14:59
  • 호수 19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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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여순 감옥에서 순국한지 꼭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한일합방과 식민통치의 주역이었던 이또히로부미(伊藤博文)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육철포(6발 장전의 구식 권총) 3발로 사살하고 현장에서 체포돼 여순감옥에서 144일간의 옥고를 치르다가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에 교수형을 당했다. 오로지 조국의 독립과 세계평화를 위해 일본과 맞서 싸우다가 32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

안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 마리아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자(字)는 가슴에 7개의 검은 점이 있어 응칠(應七)이라 했고 이름은 그가 성질이 좀 급하고 가벼워서 중근(重根)이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그의 나이 16세에 김아려와 결혼을 하고 17세에 부모를 따라 천주교의 세례(세례명: 도마)를 받고 28세가 되면서 독립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할 때 까지만 해도 사냥이나 다니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집을 자주 드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27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어 집안의 가장이 되자 부친의 유지를 이어받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1905년에는 김구(한 때 안중근 의사의 부친과의 교분으로 안 의사 집에 기숙)의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가기도 했으나 부친의 사망으로 급거 귀국했던 것이다. 안 의사는 집을 청계동에서 진남포로 이사를 하고 두 동생과 함께 2개의 학교(삼흥-돈의)를 설립해 민족교육을 통한 구국활동을 하다가 1907년에 이르러 심상치 않은 한일간의 국제정세와 점점 난폭해지는 일제의 만행을 보고 고향에 앉아서는 조국의 자주독립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고향일은 두 동생에게 맡기고 홀연히 노모와 어린 아내와 아이를 남겨두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주한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중국 간도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게 된다.

안중근 의사는 현지 독립투사들의 협조를 구했다. 현지 동포들에게는 일제만행에 의한 조국의 참상을 알리면서 군자금과 의병을 모집하고 훈련시켜서 1908년 7월에는 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일단의 의병을 이끌고 함북의 국경지역으로 출전해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크게 이겨 상당수 포로병까지의 전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안중근은 참모중장의 명으로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하게 된다. 아마 그의 종교적인 신념(천주교의 박애와 평등사상)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 돼 적군의 반격이 심대해 졌고 끝내는 중과부적으로 참패하면서 겨우 부하 몇 명만을 데리고 산속을 헤매다가 돌아오게 됐다.

이와 같이 패장이 된 안중근은 실추된 명예를 되찾기 위한 재 출병의 날을 기다리고 있던 차, 1909년 10월 26일경에 일제의 조선통치 거두 이또가 청일전쟁에서 탈취한 만주지역의 관할권을 두고 러시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를 순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저격을 감행할 절호의 기회로 잡았던 것이다. 이미 그해 2월 7일에는 의병출신 12명이 모여 약지를 끊은 정천동맹(正天同盟 : 단지동맹)을 했으며 이 때 안중근 의사는 태극기를 펼치고 4괘 자리에다 ‘大韓獨立’이라는 혈서를 유품으로 남겼다.

드디어 1909년 3월 26일 오전 9시 30분경 이토 일행을 태운 기차가 만주 하얼빈역의 프랫홈으로 서서히 들어서면서 멈추었고 이또를 위시한 일단의 각료들이 내려 소련군과 일본 관리들의 환영대열을 향해 걸어갔을 때 순식간에 대열을 제치고 앞서나간 안중근 의사는 3발의 총알은 이또에게 나머지 3발은 그와 대동하던 일본 하얼빈 주재 총영사관과 비서관에게 쏘았던 것이다. 그러자 안중근 의사는 곧바로 에워싼 러시아 헌병에게 현장에서 순순히 체포되면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한편 총에 맞은 히로부미는 구급차에 실려 갔지만 과다출혈로 서서히 죽어갔던 것이다.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太次郞)가 이또의 귀에 대고 범인은 ‘조선인입니다’라고 말하자 ‘망할 놈’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러나 히로부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안중근 의사는 ‘나는 한국인이다. 축하해야 할 것은 나라를 위해 원수를 갚았고 또 불행한 우리 동포들을 대신해 원수를 갚은 것이다. 나는 정말 기쁘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면 안 의사의 옥중생활 모습은 어떠했으며 옥중저서로 유명한 미완작인 <동양평화론>의 내용은 무엇인가이다. 마침 지난달 초에 이런 것들에 관한 한ㆍ중 연구교수들의 국제세미나가 그의 순국지인 여순(旅順)에서 개최됐는데 그곳에 참가해 주제발표를 하면서 현장을 직접 보고 배우는 기회가 있었다.

4개월 남짓 옥고를 치렀던 여순감옥과 재판을 받았던 ‘일본관동 법원’ 그리고 재판정을 중국이 아파트의 개발지로 정하고 허물어 버리려고 했던 것을 국내의 통일그룹이 국내의 안 의사추모회와 함께 중국정부와 교섭해 건물을 어렵게 매입한 다음에 원형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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