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자, 그 한없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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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 그 한없는 즐거움
  • 서 관 호 시인·본지 논설위원
  • 승인 2010.04.08 19:01
  • 호수 19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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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 치자 화분에 벌써 꽃봉오리가 맺혔다. 이것은 꽃치자이며, 치자나무 꽃은 6월에 핀다. 삭막한 겨울동안은 집안을 푸르게 해 주었고, 베란다의 온실효과 때문인지 진작부터 새순을 피워 올리며 싱그러움을 더하다가, 앞으로 석 달 가량은 새하얀 꽃이 순결함을 다투어 피고 향기 또한 천리향을 시새울 것이다. 그리고 가을이면 그 주황색 열매는 얼마나 수많은 주머니들을 매달고서 한없는 포만감을 줄지, 내 가슴이 조만간에 터질 저 꽃봉오리처럼 설렌다.
치자(梔子)는 유자, 비자와 더불어 자랑스러운 내 고향 특산물 남해삼자(南海三子) 중의 하나이다.
나는 일찍이 중학 시절에 불과 삼사십 미터에 지나지 않지만 한 자루의 밭뙈기 가장자리에다가 치자나무를 줄지어 심은 적이 있었다. 당시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그 밭 안쪽 산자락에다 유택을 마련하였기에 할머니께 꽃밭 하나를 만들어드리고도 싶었고, 하얀 치자꽃으로 피어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바라보고 싶어서 할머니를 그리는 어린 마음을 스스로 달래려고 했던 기억이 어제인 듯 선하다.
비자나무가 오늘날의 정유공장과 같은 용도로 난포현의 난음리 일대에 계획적으로 조림되었던 것처럼, 치자는 어찌하여 남해에서 오래 전부터 어린 아이가 줄줄이 심을 만큼이나 흔하고 친숙하고 유용한 나무였을까? 치자 역시 비자와 마찬가지로 언제, 누가, 왜 심었는지는 전해지는 기록이 없다. 하지만 그 용도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는 가늠할 수가 있다.
치자의 용도는 우선 그 노랗고 짙은 색소를 염료로 사용하는 것이다. 삼베나 모시 따위의 천에다가 치자 물을 알맞게 들이면 연노랑, 노랑, 주황 등 다양한 색상의 천을 만들 수 있어서 요샛말로 표현하면 소위 패션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원자재였던 셈이고, 농본사회에서 흰색의 간수가 어려웠던 점에 비추어 물색 옷이 편하고 수월한 것이었기에 무슨 색이든지 염색을 해서 입어야 했던 만큼 치자와 쪽 등이 구하기 쉬우면서도 물이 잘 드는 주요 염료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치자는 식용으로도 쓰였는데, 주로 전(煎) 같은 것을 부칠 때 치자를 우린 물에다 반죽을 하여 부침으로써 노릇노릇한 태깔이 입맛을 돋우기도 하거니와 보기에도 얼마나 멋스러웠는지 모른다. 이 치자전은 시집살이에 병이 생긴 가슴 답답하고 화끈화끈 열나는 며느리에게 효과가 좋은 청열식품이라고 하니 며느리라도 남해며느리가 행복했을 거라는 위안을 가져도 본다. 또한 치자는 술로도 담그는데, 향으로 마시는 꽃술과 빛깔로 마시는 열매술이 있다.
이렇듯 치자는 약재로도 쓰였던 만큼 식용색소로 사용함으로써 자연히 강장 내병의 효과를 낼 수가 있었을 것이다. 한약으로서의 치자는 불면증, 황달, 소염, 지혈, 이뇨 등에 효능이 있으며, 치자차는 감기에 의한 인후통, 편도선염, 고열, 호흡곤란 등에 좋다고 되어있다. 그밖에도 한방의서에는 치자의 효용을 수십 가지로 들고 있다.
그리고 치자나무는 잎이 넓은 상록활엽수인데다가 더 이상 희지 못할 흰색의 꽃을 피우며, 향기가 좋고 멀리 퍼져서 관상수로서도 각광을 받는다.
특히 삽목이 가능해서 번식이 용이하고 가지를 여러 갈래로 많이 뻗기 때문에 외모를 정비하면 보기가 좋아서 정원의 테두리용으로서 일품이다. 한국통신남해지점 정원이 그 좋은 예이다.
되도록이면 짧게 적었어도 이 만큼이나 다용도수종이다보니 지혜로운 우리 조상들이 심어 가꾸지 않았을 리가 없는 나무다. 아파트 생활이 보편화된 오늘날에도 치자화분 하나만 가꾸어도 꽃도 보고, 잎도 보고, 열매까지 얻는데다가, 차와 술, 약과 염료 등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꿩발 약하고, 깃털로 눈까지 닦는 셈이니, 치자꽃의 꽃말처럼 진정 ‘한없는 즐거움’이 될 것이다.
특히 치자에 물들어서 자라난 재외 군민의 경우 치자화분을 볼 때마다, 치자꽃 향내를 맡을 때마다, 태깔고운 치자를 볼 때마다 고향생각, 부모님 생각을 떠올리는 행복한 시간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3천원만 들이면 꽃치자 한 그루를 살 수 있고, 아파트 베란다가 고향 언덕으로 변하면서 고향 냄새에 흠씬 빠져볼 수가 있다. 이것은 남해사람만이 가지는 특권이라고나 할까?
 이 봄날, 며칠만 있으면 우리 집 베란다에 치자꽃이 활짝 피고 그 향기는 향수가 되어 할머니 무덤가로 나를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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