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소설의 성립과 창작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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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소설의 성립과 창작 배경
  • 박성재(남해역사연구회 유배문화연구소장)
  • 승인 2010.04.22 17:51
  • 호수 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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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포소설과 심청전에 형상된 관음의 동일성 중심으로 -

2. 목적소설과 이상소설

 

서포(西浦)는 두 가지 소설을 제작(製作)했다. 하나는 목적소설(目的小說)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이고, 또 하나는 이상소설(理想小說) 구운몽(九雲夢)이다. 한 인간의 일생을 통하여 이렇게 이질적인 두 작품을 제작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례적(異例的)인 일이다. 그것은 그 당시 정치적 배경이나 서포 가계(家系)의 환경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해명하기가 어렵다. 김무조 박사는 서포소설의 성립과정을 연구하는 데는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이 두 소설을 독립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무위(無爲)에 가깝다.”라고 한다. 이 두 소설의 창작시대나 창작동기를 규명하는데 있어서는 이 두 소설은 동전(銅錢)의 양면(兩面)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서포가 남정기(南征記)를 쓸 때에는 서인파(西人派)의 재집권(再執權)이란 정치적 큰 목적이 전제(前提)하고 있었기 때문에 환몽적(幻夢的)인 이상(理想)을 추구(追求)할 겨를이 없었다. 오로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사씨남정기를 구상한 것이다. 물론 여기의 사씨(謝氏)는 인현왕후(仁顯王后)고 남정기(南征記)는 남인파(南人派)를 정벌한다는 의도(意圖)가 내재(內在)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구운몽은 그야말로 꿈이다. 정치적 목적이 수포(水泡)로 돌아가자 서포는 이제까지 자신이 꿈꾸어 오던 인생의 부귀영화(富貴榮華)를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축약(縮約)해 본 것이다. 이것은 한 인간이 일생을 살아오면서 생에 마지막 이 세상에 남기는 유서(遺書)와도 같은 것이다. 구운몽은 서포가 이 세상에 나서 목적했던 모든 것이 이제는 소생(蘇生)할 길이 전혀 없다는 결정적 시기에 제작되었다. 이 시기가 바로 남해 영어(囹圄)때였다. 그렇다면 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목적소설인 사씨남정기가 남해서 저작되었다고 한다면, 이상소설인 구운몽은 사씨남정기보다 후작으로서 마땅히 남해적소에서 썼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서포소설의 제작 시기, 동기를 고구(考究)하려면 두 소설을 대비연구(對比硏究)하지 않으면 그 해답은 얻기 어렵다. 심청전의 배경이 된 관음사 사적과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의 배경이 된 관음영장(觀音靈場)인 남해적소 현지의 지정학적 조건이나 지세(地勢)의 환경을 현장에서 실측(實測) 답사(踏査)하는 것도 중요한 조건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고 서포가 육필(肉筆)로 쓴 서포만필(西浦漫筆)이나 서포집(西浦集)을 섭렵(涉獵)하는 것도 좋은 방편(方便)의 하나이다.

 

3. 곡성 관음사와 심청(谷城沈淸)

 

1) 곡성 관음사(觀音寺)

 

관음사(觀音寺)는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 2번지 성덕산(聖德山)에 자리하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의 말사이다. 규모가 큰 절은 아니다. 그런데 이웃 순천의 조계산 송광사에 가면 성보박물관에 이 절의 역사를 기록한 [옥과현 성덕산 관음사 사적 (玉果縣聖德山觀音寺事蹟)]이 보존되어 있다. 조선조 영조 때 (1729년) 백매자(白梅子)라는 분이 우한자(優閑子) 스님이 들려준 절이 생긴 내력을 다듬고 원통전의 상량문 기록 등 중창한 자취를 뒤에 붙여서 찬술한 기록이다. 목판 인쇄를 했는데 목판은 멸실되고 송광사에 보존된 것이 유일한 판본이다.

관음사의 사적과 관음사 연기설화에 대하여 고현석의 기고문을 요약정리 하면 다음과 같다.[각주: 기고문 : (사) 한국지역문학인협회, [제4회 대한민국 문학메카] 자료집, 2004. 12. pp.112 ~120]「옥과현성덕산관음사사적(玉果縣聖德山觀音寺事蹟)」·「관음사사적」·「금랑각중건기」와 같은 사적기가『한국사찰전서』에 전하고 있어 참고가 된다고 한다. 이 가운데 「옥과현성덕산관음사사적」에 보면 절의 창건은 백제 분서왕 때인 308년에 성덕(聖德)이라는 처녀가 낙안포에서 금동관세음보살상을 모셔다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창건 뒤 성공(性空) 스님이 성덕의 상(像)을 만들려 하다가 생각을 바꾸어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절 이름을 성덕산 관음사라 했다고 전한다. 한편 성덕의 창건 직전에는 이 지역의 여인으로서 중국 진나라 무제의 황후가 되었다는 홍장(洪莊)의 이야기가 창건 연기 설화로 전하는데, 이 홍장의 설화는 「심청전」의 원형 설화로 설명되기도 한다.

「옥과현성덕산관음사사적」는 1729년(영조 5)에 관음사에서 간행된 책인데, 당시의 주지는 해청(海淸) 스님이었고, 그 밖에 팔영(八英)·탄명(坦明)·만정 승오(萬晶勝悟)·순학(舜學)·극초(極初)·여익(呂翊) 스님 등의 이름이 보인다. 이 사적에 의하면 관음사는 서기 300년에 창건된 유서 깊은 절이다. 백제가 불교를 공인하기 훨씬 이전이다. 고려말인 서기 1374년에 5중창을 했다는 상량문의 기록에 미루어 유추해도 창건연대가 서기 3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감직하다. 그렇다면 관음사가 “백제불교 최초 가람”이라고 내세울 만하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관음신앙의 유래에 관한 학술적 연구를 통해서 관음사의 역할이 구명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관음사사적]에는 정유재란 때 (1579년) 오직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전(圓通殿)만 남고 모두 소실된 것을 그 후 몇 차례 중수한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관음사 원통전은 고려시대의 목조건물로서 국보 제273호로 지정되었고, 그 안에 모신 금동관음보살좌상(金銅觀音菩薩坐像)은 보물 제214호로 보존해 왔는데, 불행하게도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휴전 후 1954년에 타지 않고 남은 대은암을 옮겨 지금의 원통전을 지었으니, 소중한 문화유산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현재 관음사 경내에는 우리나라 유일의 어람관음(魚藍觀音) 상이 있고, 비록 머리 부분이 깨져나가고 불에 그슬렸지만 마치 백제의 미소를 전해주는 듯싶은 소조불상(塑造佛像)이 보존되어 있어서, 이 절의 유구한 역사를 전해주는 듯하다. 소조불상을 성덕보살의 상이라고 하며, 오산면 가곡리에는 고려시대의 5층석탑이 있는데 ‘원홍장효행탑’이라고 전해진다. 이들에 관한 학문적 연구가 절실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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